발행인 유헤자. 편집주간 권남희 / 도서출판 선우미디어
지난 호의 월평(2008. 5월호)
일상과 문학의 상호 삼투
권대근
문학박사, 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은 생활 경험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글이다. 일상 생활과 문학이 바람직하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 경험의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유의해야 한다. 생활 경험을 성찰한다는 것은 삶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이는 어느 정도 자기 공명 내지는 자기 감동의 요소를 수반해야 한다. 또한 경험의 반추와 성찰에는 인간의 모든 지각 기제가 다 동원된다.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면 형상성, 참신성, 함축성, 탄력성 등을 갖추어야 한다. 평자는 문단의 완결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형식을 갖추지 않은 작품은 일단 이 점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기로 하겠다. 이번 월평의 관점은 생활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의 논리성이다.
문학회 순례 코너에 <산영수필문학회> 편이 실렸다. 산영수필문학회는 1988년 이정림 선생의 문하생들이 모여 만든 수필동인회로 <에세이21>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서정숙, 홍애자, 한향순, 김창송 등의 수필가가 필진으로 참여했다. 출발한 지가 20년이나 된 신영수필문학회와, 수필전문지 <에세이21> 출신 작가들의 저력을 기대해 본다.
서정숙의 <중국에서 물건사기>는 중국인과 거래를 한다거나 사업을 해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을 직접 경험하면서 실감한다는 내용이다. 사람에 따라 값을 다르게 부르는 중국 상인을 상대로 해서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사고 나서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을 느끼는 작가의 익살이 재밋다. 상인 한 사람을 보고 그 나라의 수준과 국민성을 가늠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작가는 이런 오류를 의식해서 ‘물건 값이 제멋대로인 중국이지만 거리를 내다보면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고 전개부에 적고 있다. 단면을 보고 중국의 수준을 얕잡아 보면서도, 그러한 단면보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전략적 반론꺾기가 잃어버릴 뻔한 공감을 준다. 주제 중심의 일관성은 좋았으나 문단 형식에 유의했으면 좋겠다.
홍애자의 수필<떼장과 어머님>은 한국적 수필로서 전통 미학이 돋보인다. 우리 조상들의 솜씨가 묻어나는 음식에서 손맛을 우려내기 때문이다. 서울토박이로 어렸을 적부터 시어머니의 상차림을 보아왔던 작가가 토속식품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다가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떼장 요리를 해서 어머니의 손놀림을 떠올려 본다는 내용이 발단부에서 전개부까지 수놓아져 있다. 어머니의 손맛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패한 화전요리를 언급하고, 화전을 시식하고 그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결말부 가서 이 글의 핵심 제재인 떼장을 버리고, 강계국수와 두부장과 돼지고기 삼겹살 풋고추볶음에서 어머니의 맛을 찾고, ‘이 음식들을 만들 때마다 아름다운 어머님의 미소와 손놀림이 애틋하게 그리워진다‘고 한 부분은 주제적 양식의 수필 구성 전략으로는 좀 부족하다. 수필은 이 장을 보아도, 저 장을 보아도 주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수필 구성도 이런 차원에서 전략적이어야 한다. 수필과 같은 문예문에도 논리의 일관성이 요구되어진다는 말이다.
한향순의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수필은 창작의 모티브가 매우 인상적이라서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잘 모른다. 일반인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듯, 간혹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한 평론을 읽고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수필은 스승이 작품세계에서 써준 글귀를 단서로 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빈센트 반 고흐의 모습이 담겨 있을까 싶어 고흐를 알기 위해 화집을 뒤적이고 그에 관한 글을 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열정을 찾아나서는 작가의 노력이 바로 수필적 삶이다. 이 수필이 지향하는 바는 본질은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의 나타내는 데 있다. 그저 광기어린 천재화가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가 자신의 숨은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알려진 바와 또 다른 고흐의 평범한 일면을 발견했다는 대목은 삶에 있어서도 인식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의 수준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은 작가의 성실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결말의 ‘나도 수필의 글밭에 알찬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가꾸어 보련다’는 진술은 제목에서도 나와 있기 때문에 중언부언이다. 또한 마무리를 진부한 다짐으로 끝내 처음의 참신한 발상으로 얻은 점수를 까먹은 건 아쉽다고 하겠다.
김창송의 <그래도 내일은 있다>는 유조선 사고로 황폐화된 태안반도로 봉사활동을 나가 쓴 일종의 봉사활동기다. 새벽잠을 설치며 집을 나서는 장면부터 도착해서 자원봉사자로 등록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데까지 시간 순서적으로 단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헌신과 봉사정신을 알리는 이런 류의 글은 제재로 선택하기 쉽지 않은 글이다. 잘못하면 자랑거리가 되어 자신을 홍보하는 글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 ‘의잡’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 일까, 발단부에 작가는 ‘매스컴은 망연자실한 태안 주민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하라고 외친다’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제목은 내용의 단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고, 수필은 주제의식을 구체화시켜야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는 글이다. 제재에 주제의식을 담아 함축하려는 전략은 세우지 않고, '본 대로 느낀 대로' 한꺼번에 경험을 다 쓰려고 하니,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제대로 안 되어 ‘그래도 내일은 있다’는 핵심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이제 영원히 저 바다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에 이어지는 ‘그래도 내일은 있다.’의 형식논리로는 참이지만, 인식논리로 이해하기에는 ‘내일이 있다’고 확신할만한 진술이 구체화되지 못해서 아쉽다. ‘그 날이 어서 속히 임하기를 손 모아 기원해 본다’는 기도문도 진부한 마무리다. 발걸음을 적절히 옮기면서 흔적을 적어 나가는 글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선한 충동이 되려면, 활동의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 수필이다. 주제의식이 선명하면서도 간접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회 순례 코너의 글과 특집, 테마에세이, 사색의 뜰에 실린 글은 확실히 달랐다. 문학회 순례 코너의 글이 소박한 서정성으로 자잘한 재미를 주었다면, 후자의 수필들은 세련된 인식과 형상화가 빛났다.
권남희의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은 자석처럼 눈길을 잡아당기는 수필이다. 사랑이란 말 때문만은 아니다.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이란 제목이 우선 호기심을 끈다. 한 번 읽고 또 읽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추억으로 남고, 추억은 아름답게 남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제하면서 작가는 특유의 문장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 그레이엄 그린처럼 앙큼한 작가의 열 한 살이 머물렀던 골목길을 찾아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추억의 실체에 실망하는 장면을 전반부로 설정한다. 본격적으로 풋사랑인 첫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작가는 그레이엄 그린의 “THE Innocent"란 소설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고향에 남아있는 자신의 천진성을 찾아 잠깐 귀향하였다가 추억의 장소를 찾아 실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열한 살의 작가가 스물일곱 살의 청년을 사모했던 순간의 마음을 풍경화로 그린 것이 이 수필에서 단연 압권이다. ”색시감 순위에서 아예 제껴져 있는 내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느닷없이 넘어지거나 남동생과 싸움을 벌이고 흘쩍거리는 일이었다“는 고백에 이르러서는 열한 살 아이의 구애전략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까지의 이야기가 절정이라면, 그러던 어느 날, 사모했던 삼촌이 어둑한 골목에서 동네 언니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에 치를 떤다. 위기다. 이 엄청난 사건의 충격으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방황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이 수필의 결미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는 유리병에 넣어 강물에 띄운 편지처럼 꿈으로 남아 세상을 부유할 뿐이다.“라는 진술로 장식된다. 이 수필은 절정-위기-해결의 획기적인 전환을 통해 "첫사랑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세상의 진리를 다시 한 번 일반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주제의식의 의미화말고도 이 작품의 우수성은 마음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고 참신하게 그려내는 형상성에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하필 유리병일까. 강물을 따라 흐르다 돌에 부딪쳐 깨어지면, 그 편지는 젖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꿈으로 남아 세상에 부유할 뿐이라고 했나보다.
정인조의 <나의 작은 보물들>이란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이 수필은 인간성의 특성을 발견해서 보여주는 것을 주제 지향성으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인상적인 경험을 반성적 성찰로 풀어낼 때, 감동을 준다. 특히 사물의 모습이나 느낌 등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형상화 측면에서 작가의 기량이 돋보인다. 나상의 고백으로 써나가는 이 수필은 서두에서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모험성과 호기심에서 찾는다. 이런 명제로부터 작가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자기모순이라고 말한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저가 하면 로맨스라더니 지금 내 꼴이 딱 그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대목에서, 작가는 자기 중심적인 이해를 반성적인 성찰로 연결시킨다. 그 결과를 실천으로 행동하는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낸다. 수필이란 자기 성찰의 글이다. 수필을 쓰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상투적인 생각에 젖어서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작가가 구사하는 열거법에 의한 문장이 재미있게 다가서는 데는 작가만의 특유한 비법이 있다. ‘몽돌’의 묘사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문갑 위의 돌에서도 여인의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여인의 형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낭만주의자가 아닌가. 표현이 갖는 탄력성과 참신성은 이 수필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마지막 결말의 자작시 한 편에 주제의식이 실리니, 이보다 더 멋진 주제의미화가 또 있으랴. 돌의 무게가 솔방울의 가벼움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다는 표현이 인간화되면서 작가가 그리는 여인의 이미지를 다시 떠오른다. 그럼으로써 이 수필은 여운의 문학으로서 수필의 틀을 유지한다.
최석구의 <어느 지망생>은 내과의사이자 교수가 쓴 수필이다. 작가가 글 쓰기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문학가 지망생으로서의 소망을 비교적 솔직하게 쓴 글이다. 이 수필에서 눈길을 단연 끄는 것은 ‘나는 부러운 것이 많다’는 발단부 첫문장이다. 의사이면서 대학 교수라면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별 부러운 것이 없으리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수필은 첫문장이 ‘부러운 것이 많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다’는 진술을 내세워,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활기록부 자택란에 동그라미를 해야 하나, 셋집에 동그라미를 해야 하나 양심을 저울질했던 때도 있었다’는 보조문장을 통해 어린 시절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들을 꺼집어내어 가난의 경험이 있는 중년 독자들의 누선을 자극한다. 수필은 발단의 미학이 빛나는 글이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어렵게 살아온 독자를 구원하고자 시도한다. 두 번째 단락의 첫 문장을 보면 또 놀라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 부러움의 대상은 싸움을 잘 하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발단이다. 분위기 잡는 기능으로 충분하다. 수필은 주제의식을 일반화하여 의미화하기 전에 전개부에서 주제의식의 구체화 작업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작가는 이 같은 사실을 흔히 꿰뚫고 있다는 듯 본격적인 이야기 단락인 전개부 앞에 두 가지의 부러움을 적고, 이는 어렸을 때, 동심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다고 말한다. 이순이 머지않은 요즘엔 글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썼다는 데서 이 수필의 구성은 이원적임을 알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비교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단락에서 또 부러운 것이 하나 더 제시된다. 젊음이 부럽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대목이 마지막 결말 단락에 스며있는 주제의식의 의미화에 상응하려면 부러운 이유가 글을 잘 쓰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나와 비교한 누구가 아닌 바로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문장은 그 뜻이 모호하다.
김영은의 <소욕지족>은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의 지혜를 갖자는 주제의식이 강하게 표면에 드러난 글이라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 아쉬운 것은 제목에서 주제가 바로 드러나 버린 데 있다. 사자성어로 된 제목을 두 개로 분리해서 ‘소욕’이나 ‘지족’으로 했으면, 수필의 특성을 더 잘 살렸을 것이다. 오칠선의 <인생은 처음과 끝이 같아야>라는 수필도 위 수필과 마찬가지다. 제목에 바로 주제가 드러나 버린 경우다. 수필의 문학성은 주제의식의 형상화에서 나온다. 이 두 분의 인생에 대한 지혜로운 충고가 수필의 창작원리와 잘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학은 한 민족이 최고로 도달할 수 있는 사상과 정서를 언어로 표출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가 수필을 읽을 때 감동을 받는 것은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동은 모두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 기능이라 할 때, 수필은 예술적 창조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위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못한 여러 작품 중에서도 내용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작품도 많았다. 박기옥의 ‘맥주는 크리스탈처럼 차갑고 맛이 있다’는 <맥주 한 잔>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난 경수필이었다면, 영국 정치인들의 기지에 찬 유머를 소개하고, 우리 정치인들의 엄숙주의를 비판한 안영환의 <대영제국과 언어적 유머>는 세련된 지성이 돋보인 글로서, 정서적 감동을 머리에 호소하는 중수필이다. 태안의 자원봉사자들을 백합꽃으로 비유해 쓴 김혜숙의 <태안에 핀 백합꽃>은 작가의식이 빛나는 수필이다. 봉사를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장면을 ‘차창 밖 어두움 저편에 낯익은 거리가 들어온다’는 표현으로 잘 마무리한 결미가 멋졌다.
강석호의 비평에 대한 언급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말은 옳고 그름과 장점과 단점,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논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이지만, 문학 예술에서의 비평은 장점보다 단점, 옳음보다 그름, 아름다움보다 추함을 지적하는 데 그 역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의 가부를 판정하는 것보다 앞으로 발전과 개선을 지향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점과 긍정적인 지적을 우선적으로 하다 보면 안주와 퇴보를 가져오기 쉬우며, 미흡점과 문제점의 지적은 일시적으로 의욕상실이나 의기소침을 가져올지 모르나 불원간 긍정과 향상을 가져오는 동기와 자극이 된다." 이번 월평은 위의 관점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다.
<한국수필 5월호 월평>
좋은 수필을 읽는 즐거움
변해명
한국수필 5월호는 다양한 주제로 묶은 다양한 수필들과 만나 읽을거리로서의 기능을 한껏 발휘한 느낌을 주었다. 특집 해외심포지움으로 ‘내가 만난 일본문학’에 ‘일역수필’ 이 돋보였다. 5월을 테마로 한 ‘소중한 나의 가족’ 도 가족을 생각하며 글을 읽게 하는 글 모음이었다. 같은 읽을거리라도 아기자기하고 섬세하게 편집한 수고가 엿보였다.
그 중 좋은 수필 몇 편을 뽑아 좋은 수필을 읽는 즐거움을 찾아가 본다.
테마 에세이 ‘소중한 나의 가족’에서 정명숙님의 <달빛>과 신현복님의 <꽃잎 떨어지다>가 기억에 남는 수필이다.
위의 두 글 다 이미 세상에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글로, 떠나보낸 가족을 가슴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그리움과 한을 담아 살아오는 세월을 보여주는 절절함이 살아 있는 가족의 이야기보다 더 애틋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명숙님의 <달빛>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달빛’이란 은유적 표현으로 자신의 내면에 드리운 정감을 포괄적으로 쓰고 있다.
‘2006년경부터 인터넷에 조흔파의 <달빛>이라는 시가 음악으로 변신된 노래로 뜬다고 지인에게서 연락을 받고’ 인터넷에서 <달빛>의 시를 만난 필자는 남편과 해후하는 것 같은 놀라움과 그리움, 그리고 살아서 그의 외로움을 포용하지 못했던 자신의 후회와 아픔을 차분하게 쓰고 있다.
유리창에 부서지는 달빛이 하도 고와
한 자락 끊어내어 그대에게 보내오니
내게로 오시는 길 어둡거든 밝히시고
임이여 나 본 듯이 친구삼아 오소서
나뭇잎에 반짝이는 달빛이 너무 고와
한조각 오려내어 그대에게 보내오니
서둘러 오시는 길 아득히 멀거들랑
임이여 바람결에 소식 먼저 보내소서
살아생전 한 번도 아내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그의 애틋한 사랑의 고백을 그가 떠난 30여 년 만에 그의 시를 통해 느닷없이 밖에서 만나게 된 남편의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와락 서러움으로 밀려온 그는 그 격랑을 꼭꼭 씹어 삼키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곳을 잃은 아픔을 새삼 절감한다.
‘30여 년 전 달빛을 보며 눈가를 적시던, 마음 여린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며, 필자는, ‘그때 그가 달을 향한 슬픔의 의미를’ 그의 <달빛>을 통해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필자는 지금도 책상머리에 두고 부적처럼 바라보는 한 화백의 그림을 통해 ‘달빛’속에 깃들인 그의 마음을 새삼 되색임질 하는 것이다.
책상 위에 아주 작은 그림 한 장이 있다. 1980년 12월 24일에 남편이 세상 떠난 일주일 후, 여산 이원재 화백이 석별의 정을 담아 보낸 , 엽서보다 조금 큰 그림이다. 산위에 달이 떠 있는 금박화지 그림에 정읍사 첫머리 ‘ 노피곰 도샤’로 화제를 쓰고 뒷면에 ‘흔파님 가시는 길 비추어 주시소서 합장’이라고 썼다. …… 내게도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줄 것 같아 부적처럼 책상 위에 놓아 두었다
세상을 뜨기 몇 년 전부터였다. 백련산이 올려다 보이는 홍은동 집에서 남편은 달밝은 밤이면 북을 안고 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짓는 일이 많았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청승을 떤다고 화를 냈다. 무엇이 그리 슬펐던가, 짧게 끝날 인생을 예감했음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두고 갈 일이 기가 막혔던 것일까, 나는 청승이라 몰아붙이며 슬픈 이유를 묻거나 위로하려고도 안했다.
달빛에 젖어 북을 치며 달빛을 읊던 사람, 차마 마주 대할 수 없어 청승떤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윽박지르던 자신이 지금은 한이 되어 서럽게 다가온다. 그가 남긴 시 <달빛>을 만나지 못했다면 남편의 깊은 마음과 끝내 해후도 할 수 없었을 것을.
유리창을 닫아도 교교한 달빛… 속이 깊은 그가 ‘달아 높이 떠서 내 아내 가는 길에 비춰주소서’하기는 쑥스러워<달빛> 노래를 대신 보냈나보다.
하며, 남편이 아내에게 쑥스러워 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을 아내가 대신 남편의 목소리로 읊조려 보는 것이다. ‘달아 높이 떠서 내 아내 가는 길에 비춰주소서’하고.
남편 조흔파는 달빛이 되어 그림 속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노래 속에서도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 수필은 달빛이 주는 암시성이 표현해내는 심미적인 형상화로, 독자로 하여금 달빛(조흔파)에 젖어 들게 하는 정서적인 효과를 높여 감동의 폭을 살려내고 있다.
신현복의 <꽃잎 떨어지다>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어머니 병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실려 가던 날, 지인으로부터 진분홍 호접난이 배달되어 왔다. 전날 저녁에만 왔었더라도 어머니께서 보고 얼마나 기뻐했을 텐데…….
어머니를 묻고 현관을 들어섰을 때, 화분에 달린 ‘빠른 쾌유를 빕니다’라고 적힌 분홍 리본이 또다시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여전히 선명한 진분홍 꽃잎이라니
그러나 어찌하랴 싱싱한 꽃잎도 바람이 불면 힘없이 덜어지듯 인생이 이토록 속절없음을. 어머니 분신 같은 꽃잎을 차마 쓸어낼 수가 없어 담 밑에 수북이 모아 놓는다……. 화창한 봄날이 가면 꽃도 함께 진다는 것을 예전에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어머니 세상 뜨신 후에야 비로소 이렇듯 절절하다.
정명숙님은 세상에 없는 남편을 ‘달빛’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신현복님은 어머니를 ‘진분홍 호접난’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 두 필자는 내면에 머물고 있는 그리움을 사물에 비유적으로 연결하여 두 사물 사이에 내적 동질성을 파악하는 표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명숙님의 <달빛>은 시적인 이미지로, 신현복님의 <꽃 떨어지다>는 사유적인 이미지로 소재를 이끌어간다.
‘봄날이 가면 꽃도 함께 진다는 것을 예전에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어머니 세상 뜨신 후에야 비로소 이렇듯 절절하다.’는 표현은 다소 진부한 표현이 더 것도 같으나 어머니를 그리는 고백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김혜숙님의 <태안에 핀 백합꽃>은 자연을 훼손하고도 변명에 급급한 인간의 오만함을 돌아보게 하는 글로, 필자의 진솔한 고백은 문장에 앞섬을 보여준 글이다. 그래도 인간에 거는 기대와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긍정적인 면이 아름답다.
태안군 모항에 천육백 송이 백합이 순결하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태안 유조선 유출로오염된 이 바닷가에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하얀 방제복을 덧입은 사람꽃이다. 서해안을 살리기 위해서, 자연을 지키기 위해 나선 흰 제복의 장엄한 행렬,……
이곳에 온 필자는 기름찌꺼기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방제복을 입은 인파를 백합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을 돌아보며 ‘내가 딛고 사는 이 세상을 위해서 그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한다. 태안의 참혹한 현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아픈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봉사자들에게서 풍기는 백합꽃 같은 향기가 끝없이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
읽는 이에게 그 대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평범하게 쓴 일일 체험기이다. 돋보이는 문장은 아니지만 그 속에 담겨진 마음이 돋보이는 글이다.
정목일님의 <섬진강의 봄>은 하나의 주제 아래 다른 두 글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서 의미가 서로 조응되면서 상호 보완되거나 동일한 의미를 강조하는 수법이 돋보인다.
정인조님의 <나의 작은 보물들>은 글의 반전에 묘미를 보인 글이고, 유연선의 <유년의 자화상>은 고호의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자화상 들여다보기, 심창섭님의 <흔들리는 일상>에서는 퇴직 후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잠시) ‘남자는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들어와야 하는데…’가 이명처럼 남는 글이다.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실제적 체험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구축된다. 상상력이 내포된 함축적인 언어로 쓴 수필은 문학적 향기를 지닌다.
글은 개성의 언어에 의해서 느낌이나 감동이 달라진다. 문학성이란 작품에 내재된 감정을 자기만의 표현으로 담아내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문장의 가능성에 매임도 알 수 있다.
독자가 작품을 읽는 첫째 목적은 그 작품이 지닌 개성적인 언어에 의한 표현에 의존하는 것이지 이야기에 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글이란 문제의 제기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글은 읽음으로서 독자에게 감동을 가져다주는 글이라면 더욱 좋은 글이 될 것이다.
그런 수필을 읽을 수 있음은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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