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치이사장 .권남희수필가(비오는 날 )
문효치시인.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시인,수필가 -은마상가 식당
문효치 시인 (일부러 이렇게 찍어보았다)뽀샤시효과 넣음
2008년 문파문학 여름호
권남희수필가(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의
문효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인터뷰
- 백로수百勞水의 시인 문효치
문효치 시인에게서는 수없이 단련된 금결의 결단력이 풍겨 나온다.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부드러움의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인이 살고 있는 근방의 상가 찻집에 앉았다.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이 미처 도착하기 전 시인은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들어오셨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맡아 바쁜 시인의 일정 때문에 먼저 질문부터 꺼낸다.
시인은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 2관왕이다. 그것도 1966년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이다. 문학청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신춘문예 관문을 두 개나 거뜬히 통과한 사건에 대해 ‘운’이 더 강했던 것 아니냐고 물었다.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올라오려면 실력과 함께 ‘운’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심사위원의 시관이 자신하고도 맞아야하는 측면에서 그렇다고도 한다. 언제나 죽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젊은이에게 보낸 신의 선물이 신춘문예 2관왕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시인을 말하려면 분단역사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져야 했던 집안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도 책을 내신 지역유지였고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도 연희전문을 졸업한 인텔리에 시를 썼다. 하지만 6.25를 정점으로 집안이 몰락하는데 아버지의 월북 사실을 몰랐던 시인의 젊은 날은 고스란히 가시밭길이었다. 연좌제가 있는 줄도 몰랐던 시인이 취직이 안 되고 늘 보안서나 경찰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시대의 아픔 앞에서 시인은 항변은 커녕 울분을 안으로 삼키는 수 밖에 없어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불안과 위기감, 초조 , 울분의 정신적 충격이 누적되어 화병이 깊어졌다고 한다. 34킬로그램의 청년은 아침에 나가면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없어 죽음의 공포에 짓눌렸던 시기가 10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헤어날 수 없었던 청.장년기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독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를 써야 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를 읽고 노자를 읽으며 위로롤 얻었던 시인의 첫 시집은 죽음을 주제로 한 시들이 많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려는 심리와 불안한 공포 심리를 노출해서 덜어보려는 마음, 허무주의에 빠진 시가 첫 시집에 들어있다.
그의 시는 수백 번 흔들어 때릴 때 비로소 맺히는 그 물방울로 빚어낸 감란수甘爛水다.
소설이나 수필보다 시는 이 땅에서 유독 사랑을 받는다.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작가가 유독 시인들이 사랑받는 한국에 대해 놀랐다는 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시인 역시 긍정 하는 설명을 덧붙인다. 국제 펜 대회에서 일본시인과 대화를 하면서 들었는데 일본시인은 시집 500부를 발행한다고 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1000부를 찍어서 그 시집이 누군가에게 전달되곤 하는 일을 보면 시를 읽는 독자가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고 한다. ‘사랑받는다’는 개념의 배경에는 우리 민족이 무보다 文을 숭상하였고 선비들의 기본 소양으로 시를 짓고 읊어 자연 시인이었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무인들도 시를 짓고 읊었는데 이순신장군이나 남이장군 , 김종서, 이택 도 전투가 아니면 막사에서 지필묵을 가까이 하고 시를 지었던 예를 들어 상기시켜 준다. 이렇듯 시를 숭상하는 우리 문화가 예부터 전해왔다고 한다. 시는 경제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현대사회에서 물질적 가치로 전도되어 시의 평가가 절하된 일을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다행한 일은 아직은 시의 애정이 남아있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관심과 애정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연희 발행인이, 간혹 시가 독자를 찾아서 내려가는 현상이나 인터넷에 올라있는 시의 형태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시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며 늘 의문을 갖고 있던 시가 무엇인지 규명을 원했던 그 숙제를 풀어준다. 시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고 모든 예술의 최상위에 있기에 인기 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본격적인 공부를 거치지 않고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상을 인터넷에 적은 것은 시의 형태로만 적어놓았을 뿐이라고 한다. 대중적인 독자는 전문적인 시인의 시를 외면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는 독자가 적었다. 시는 지식층이나 상류 교양층이 문화적 유희로 즐길 수 있는 독자가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하위예술과 중간예술의 정점에 시가 있기 때문에 모두를 끌어올리는 견인능력을 시가 갖추고 있다. 100명의 독자보다 1명의 독자가 100번 읽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한다.
오히려 독자를 고급 예술로 유도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외국에는 예술 감상교육이 있다. 우리나라는 예술 교육의 부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당국에서는 ‘왜 국가에 의존하느냐, 시장에 나가서 경쟁하고 이겨라 ’하며 도리어 대중예술을 조장하며 책임을 떠넘기기만 하는 서글픈 현실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나라든 순수예술은 지원하고 육성해주고 있다. 과거에는 귀족들이 지원해주었는데 지금은 민주화가 되어 정부에 아예 문화부에서 관리하는 재단위원회가 있어서 정책적으로 순수예술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아주 미약하기만 하여 우리 문화예술에 대해 기갈이 있다. 사람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행복을 느낀다. 이러한 균형이 깨지면 불행을 느끼기에 사회와 국가에서 조정을 해주어야 하는데 현대사회는 경제일변도로 편중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지연희 발행은 시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간혹 ,왜 쉬운 시도 있는데 어려운 시만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렵게 느꼈던 시가 쉬워질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시 쓰기에서 창조성의 필요도 덧붙인다.
문효치 시인 역시 공부하는 독자는 성장한다고 응수한다. 훈련되고 교육된 독자는 어려운 시도 매력을 느끼고 오히려 쉬운 시에 흥미를 l잃어버린다고 한다. 아이들 퍼즐 맞추기를 볼 때도 그런 현상을 느낀다. 맞추기를 잘해나갈 수록 더 어려운 단계를 요구한다.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어서 어려운 것에 부딪쳤을 때 의욕을 느낀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며 거시적으로 볼 때 문화예술은 발전 지향으로 어떤 문화권은 가고 있다. 시란 자기 진실을 표현하고 창조 역량을 발휘하며 존재하는 것이기에 너무 비평적 수요에 민감하지 말고 경향에 따라가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 산문시나 유행하는 시를 쓰면 되겠지만 일부가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모든 시나 예술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데 치열한 경쟁적 시대, 삭막한 사회 등이 자연스럽게 문학에 반영이 된다. 그럼에도 6.25를 생각해보라.
구상시인은 초토의 시 라는 현실고발에서 휴머니즘을 찾았고 사랑이나 그리움을 노래한 사도 쓴다. 극한 어려움에 놓여도 정서적 향수를 노래한다. 살벌한 시대를 쓰는 시도 있고 순수시도 있기에 다양성의 총화가 민족문학을 형성한다고 본다.
시인이 백제에 관한 시를 쓰는 이유가 있다. 공주 무령왕릉 발견 소식을 듣게 된 이후 유물전시를 우연히 서울에서 보았다. 목관의 재료를 보고 관에 대한 이미지가 문득 떠올랐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배의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는 부식되었지만 옻칠이 그대로 남아있는 , 1500년 전의 나무가 썩지 않고 자신의 앞에 있었던 것이다. 1500년 전으로 올라가고 다시 끌어오며 초월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 소통이 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재미를 붙여서 유물 하나 하나를 정복해가는 작업으로 백제시를 썼다. 유물에는 백제인의 삶의 형태가 배어져 있어 한국문학의 전통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그 방법론의 하나로 백제시를 썼던 것이다. 백제는 외세를 업은 강한자의 외침에 의해 망한 국가이고 짓밟히고 인멸되었다. 힘에 의해 매몰되어 가려져 있고 연구자료도 부족한 그 부분을 문학적 접근과 상상력을 활용하여 메꿔보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전통을 이어주는 통로다. 마땅히 민족적 전통을 담아서 후대에 넘겨주는 게 예술이다.
시인의 시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를 어떻게 끌어가시는 지 알고 싶었다. 1년에 한 번씩 세계대회를 가지는데 지난해는 중국과 우리나라 ‘한중 문학간 교류’를 통해 중국 작가 20명이 방문했고 올해는 우리나라 작가 20명이 중국을 다녀왔다.
그 외에 1년에 국제 문학 심포지엄으로 해외 문학 연구가들을 5-6명씩 초청하여 우리 문학인들과 토론회를 갖는 정기행사가 있다. 그리고 세미나와 작품을 퐁해서 외국에 알리기 위해 펜문학에 소개한 우리나라 작품을 영문 잡지를 만들고 있다. 전숙희 회장 때부터 만들어왔는데 1년에 2회 해외 한국문화관련 기관 1500군데 정도에 발송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대학 도서관이나 연구소, 언론기관이다.
펜에서 해야 할 일이 해외를 향한 홍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못타는 이유도 바로 번역사업의 문제에 있다. 완벽한 번역이 없어서 외국작가 심사위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그 부분이 가장 장애요인이다. 영문과 교수가 번역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전문번역사를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양성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인재를 선발하여 장기적으로 교육을 시켜야 하고 적어도 두 나라 언어권의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이 번역을 해야 한다.
시인에게서 시를 향한 끝없는 열정을 느낀다.
시를 위한 일이라면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인에게 감명을 받은 시간이었다.
문효치 시인
1943년 전북 옥구군 옥산면에서 출생 / 동국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졸업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바람 앞에서」/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산색」
시집『煙氣 속에 서서』(신아출판사)『武寧王의 나무새』(1983년 청산사)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198년 홍익출판사)『백제 가는 길』(1999년 문학예술) /『바다의 문』(1993년 인문당)『선유도를 바라보며』(2000년 문학아카데미)『남내리 엽서』(2001년 문학아카데미)
저서 -『시가 있는 길』(문학아카데미) 『문효치 시인의 기행시첩』(문학아카데미)
동국문학상 시문학상 평화문학상 시예술상 펜문학상
『신년대』동인『진단시』 창립 동인/월간 [문학과 창작] 주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문창과 출강
- 대표시 -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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