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박범신 소설가 인터뷰 (권남희 수 필가 정리)

권남희 후정 2007. 11. 2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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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호 한국수필 권두대담


그리워 할 것 없는  사회이기에.

결핍은 현대문학의 자궁이라고 역설하는 박범신 소설가를 찾아가다 


대담: 박범신 소설가(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진행 : 이숙 사무처장

대담정리 : 권남희 편집주간

사진촬영 : 김의배 수필가.사진작가

장소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실  

일시 : 2007년 9월 12일 오후 5시



네이버 등 두 군데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선생님의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고 있어 청계천에서의 한가로운 산책은 요원해보였다. 청년작가의 산실인 문예창작과 교수실로 들어서니 ‘  이렇게 좁은 곳으로 오라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음료수를 꺼낸다. 사면에  산에 대한 사진이 붙여있어 자연스럽게 산 이야기를 꺼냈다 .  

이철호 : 히말라야, 킬리만자로를 등반하고 이후 ‘산에 중독되었다’  는 말과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건강관리도  생각하신 것이지요.  

박범신 :  산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일은 힘든 일이지요. 건강관리를 위해 산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나를 찾고 만나러 산에 오른다는 말이 맞겠지요.

이철호 : 용인 굴암산에 94년 문을 연 ‘한터산방’에서 절필선언 3년 만에  ‘흰소가 끄는 수레’연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글을 쓸 수 없다고 할 만큼 애착을 가졌는데  정리하고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

박범신: 93년 절필 이후 삶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포위되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고민이 많았지요. 나의 본질을 만나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세속적 기득권까지 버려야 했습니다.  책은 여전히 팔리던 시절이었지만 작가로서의 시장성까지 버리고 산으로 가서 채소밭도 가꾸면서 3년 동안 가족과도 헤어져서 혼자 살았습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상처받은 마음은 3년이라는 시간과 산방이 나를  치유해주었지요.   연작을  한터산방에서 썼고 그 후 10년 동안 그 곳에서  썼는데 , 한터마을은 아주 외진 곳이기에 가족에게 돌아오고 난 뒤로는 집을 많이 비우게 되었습니다. 팔고 정리한 지 3년 됩니다. 어떤 분이 문창과 나온 아들을 위해서 구입했다고 들었습니다 .           

이철호 : 아쉽습니다.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의 글쓰 기’에서 “수다만 남는다”며 사이버공간서의 글쓰기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블로그에 소설‘ 촐라체’를 연재하며 정통 글쓰기 방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한편으로는  박수를 쳤습니다. 사이버 글쓰기에 대해 말씀을 해주신다면 ?

박범신 : 인터넷은 소통을 위한 편리하고 좋은 도구이지요. 은혜롭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익명성이나 역동적인 요소 즉 악플이나 글이 인스턴트화 되고 시류에 따라 흘러 버리는 역기능은 경계를 해야합니다.  문화적 기호는 긍정적 요소와 동시에  역기능 때문에 좋은 작가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회피하면 안됩니다. 정통 글쓰기를 고수하는 작가들의 좋은 글쓰기 전범이 전재해야  문화가 업그레이드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통으로 클래식하게 네이버에 연재하는 제 소설로 젊은이들을 만나는데 즉각 반응이 오니까 즐겁기도 하지만 독자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은 없습니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독재자이며 독자를 설복해야 합니다 . 독자가  본질적으로 영향은 미치지 못하지요 .이제 작가들도  오프라인에서 지면이 없어졌다고 하기 전에 제 3의 지면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버 쪽으로 적극적으로 확장하면서 정면 돌파해 나가야겠지요.

이철호 : 평창동 김준 재즈클럽에서 ‘박범신’ 이름을 걸고 영역파괴 콘서트를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 저는 1990년도 초반부터   세종문화회관 분수대에서 직장인을 위한 점심시간 낭송문학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뜻밖의 호응에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박범신 : KBS에서 진행한  ‘박범신의  아주 특별한 콘서트’에서 저는 노래 두곡을 불렀을 뿐이고 저하고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객으로 왔기에  이야기 손님과 나 사이에 대담이 많았습니다. 제가 쓴  소설과 시 낭송으로 꾸며졌는데 참 따뜻하고 좋은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도 그렇게 음악과 함께 낭송을 하니 색달랐지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러한 자리를 만들어 독자와 만나고싶습니다 .  

이숙 : ‘나는 약하니까 쓴다’고 한 발레리의 영향을 받아 ‘결핍은 나의 운명’이라고 했는데 현재 젊은이들이  문학을 외면하는 이유와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까. 

박범신 : 결핍은 나의 운명이 아니고 현대문학의 운명입니다. 모든 절대적인 것 , 기득권으로 차있고 후원자가 되었던 처지가 무너진 자리 , 실존적인 자리에서 현대문학의 결핍은 현대문학의 자궁입니다. 그리워 할  것이 없는 사회에서 글쓰기가 뭐 필요할 게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겠지만 세상과 우리의 삶이 이지러져있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렇지 않은 세계 , 충만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필요한데 문학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문학이 독자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아니고 침체된 것도  아니지요. 열심히 쓰면 독자는 있습니다. 100만부 안 팔린다고 침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침체라고 하지만 최근에 좋은 작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학이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씨는 남아있습니다.

이철호 :  문학은 모든 예술 장르의 최저층에 있어 마치 그것은  산업사회에서 쌀농사와 같은 근간이기에  원고료는 작가들의 밥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혹시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작가들의 원고료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 있습니까. 제가 시의원으로 있을 때  100억이 결성되어 나중에 서울문화재단이 탄생했는데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범신 : 최소한 원고료는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원 사업은 있지만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원 범위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고료는 나의 밥이다’라는 말은 내가 전업작가로 있을 때 한 말입니다. 원고료는 작가에게 실존적이고 소중한 것이지요. 조선 사대부에서는 돈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현재 우리 문학의 정체성은   우리 사회의 모든 공산품보다 밑바닥인  1차 산업 쌀농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쌀농사는 모든 산업을 견인해가는 토산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모든 예술장르의 기초인 문학은   팔리든 안 팔리든 소중합니다  .

이철호 : 음악을 배달하는 ‘철가방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걸로 압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배달하는 사업도 미미하지만 이메일로 벌이고 있는데  서울문화재단이  추진하여 문학배달 운동을 확장시킬 생각은 없으신지요 .

박범신 : 가수 이남이씨가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저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가사 두 개를 써 주었지요. 문학배달사업도 좋은 아이디어이기에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철호 : 세월이 몇 년 지났지만 , 저도 이곳에서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의사와 겸직을 하고 있으니까 마음은  있어도  만나 뵙지 못하고 바삐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건강하고 오히려 더 젊어진 모습입니다. 꾸준히 하는 운동이 있는지요. 

박범신 :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오로지 강의와  소설쓰기가 전부입니다.   생물학적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은 늘 현역작가로 살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시간은 나를 조종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계속해서 새로운 형식, 소설 세계의  열망을 가지고 쉬지 않고 노력합니다. 작가는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생명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철호 :귀중한 말씀입니다. 언젠가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로부터 ‘박범신소설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가서 방언조사까지 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쓰냐’고 물어와서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