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권남희 수필가의 김후란 문학의집이사장 인터뷰 (문피문학 2008년 봄호 )

권남희 후정 2008. 7. 27. 15:35

 지연희 문파문학 빌행인 .김후란 시인. 이사장 (문학의집.서울 보노간 2층) 

 권남희 수필가 인터뷰 중 .김후란 이사장( 포스터효과 )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김후란 이사장. 권남희 한국수필편집주간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문학의집.서울 본관 2층 )

 김후란 문학의집.서울 이사장 (문학의집 본관 2층) 2008년  2월 마지막 주 ?  

문파문학 2008년 봄호

김후란 시인. 「문학의집. 서울 」이사장 인터뷰 자료입니다

               권남희 (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

 

김후란  이사장과의 인연은 1998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맡으셨을 때부터 구체적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 때 회장님을 도와드리면서 시인의 폭넓은 인맥과 추진력에 놀랐고 인품의 깊이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문학의집. 서울」을 찾을 때마다 산처럼 있으면서 모든 문인들을 이끌고 품어주는데  든든함을 느낀다.       


교육자가 꿈이었던 문학소녀

입춘이 막 지난 2월 마지막 주에 찾은 「문학의집. 서울 」본관 2층 사랑방에서 김후란 이사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일행을 맞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공책에 일기 쓰고 동시를 쓰며 문학소녀로 자랐던, 여학교 시절 문예부장이었던 소녀였다.  3개월에 한 번씩 산림 문학관에서 문학행사를 하는 지연희시인. 수필가(본지발행인)도 실내 계단을 오르며 감회에 젖는다.    

시인은, 교육자가 되고 싶어 부산 사범에서 서울대학교 사범대로 다시 진학했지만 당시 김남조 교수의 강의를 듣고 김남조 교수가 자신을 챙겨준 인연에서 이미 자석처럼 시인의 길로 끌려가지 않았을까. 40여 년 동안 10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적지 않은 산문집도 출간한 시인은 자신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를 쓰는 시인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먼저 「문학의집. 서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남산 자락에「 문학의집. 서울」이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문학의 집은 짧은 시간 안에 그 뿌리를 깊게 내렸다.  시민 누구나 환영한다는 뜻으로 대문을 만들지 않은 「문학의집. 서울」은 개관 후 5년 동안 200여회의 행사를 가졌다.  규모는 1개마다 단위사업이기에 년 40여회 행사는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우려에 축소할 것을 점검 했지만  하나도 뺄 게 없었다고 한다. “ 섬세하면서 스케일도 크고 회원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문학의 향기를 실천하고 계시지 않느냐”고 지연희 발행인은 진심어린 감사인사를 전한다.  

김후란 이사장이 문학의 집을 꿈꾸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98년 한국여성문학인회 주최 국제세미나에서 독일여성작가가 슬라이드로 보여준 독일 함부르크 문학의집을 본 후다. 문학과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도시에 고성을 기증받아 문학의집으로 열었다고 한다. 독일에는 그 전부터 문학의집이 몇 군데 있었는데 호응도가 높았었다. 시인은 그 후 우연히 꿈이 뭐냐고 묻는 유한 킴벌리 문국현 사장에게 ‘문학관’을 짓는 일이라며 독일 함부르크 문학의집 자료를 건넸고 얼마 후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문학의집. 서울에서 진행하는 문학행사는 다른 단체와는 달리 다양하고 때로는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곳까지 앞서가고 있다. 특히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 백일장을 열고 시낭송 대회를 하며 문학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고 있다.

後蘭에서 后蘭으로, 그 후 삶도  

 문단 사상 최장수 동인회이고 최초의 여성시 동인인 ‘청미’가 44년에 이르렀다. 35주년 때는 그간의 수록작품을 전집으로 총 정리하고 행사를 가졌는데 그 의미는, 앞으로 후배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우정의 모임으로 이어가자는데 있었다.         

 시인은 <바라춤> 역작을 쓴 신석초 시인이 문화부장으로 있는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대시인으로부터 시인이 될 것을 권유받았고 본명 ‘형덕’을 ‘늦게 피는 난 後蘭’으로 지어 받은 일을 행운으로 여긴다. 후에 ‘늦게 피는 난’을 ‘왕비의 난 后蘭’으로 바꾸어 시인의 사회적 활동은  더 넓어졌다고 해야겠다. 자신의 시는 존재의 확충의욕에서 발아하고 있다고 표현한 시인을 생각하면 后蘭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고요한 성품과 적은 말수인데도 폭넓은 인맥이 늘 궁금했다. 시인은 언론계 20년이 많은 분야의 사람을  알게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사회의 주요인사가 되었지만 그들이 출세가도를 달릴 때는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입은 것은 오히려 문학의 집을 운영하면서라고 한다.

시인은 장편 서사시 < 세종대왕>을 써내 필생의 역작을 남기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너로 하여 우는 가슴이 있다’ 수필집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글 쓰는 일이라면 점하나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철저함을 보이기에 혹시 그 많은 시집과 수필집을 낼 때마다 아름다운 제목도 직접 결정하는지 물었다. 그렇지는 않다며 조금 쑥스러운 듯 사실 ‘너로 하여 우는 가슴이 있다’는 앞에 ‘친구’ 가 빠졌는데 당시 주부생활 직원들에게  제목을 공모하여 학원사에서  결정했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시인들처럼 시인도 인간을 주제로 한 시를 지향했지만 누구나 작품의 경향은 바뀐다는 생각에 요즘 쓰신 시 몇 편을 추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겨울나무’와 ‘바람고리’‘ 존재의 빛’ ‘생선요리’ 를 말한다.

시인은 조용히 ‘존재의 빛’을 암송한다.


 새벽별을 지켜본다

 

사람들아

서로 기댈 어깨가 그립구나


적막한 이 시간

깨끗한 돌계단 틈에

어쩌다 작은 풀꽃

놀라움이듯 


하나의 목숨

존재의 빛

모든 생의 몸짓이

소중하구나       


“요즘 시의 흐름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시와 산문을 섞어쓰는 제 4문학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 지연희 발행인이 묻는다. 중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관은 확고하다.

“ 시와 시조의 구분도 확실해야 하는데 아무리 인터넷의 영향으로 글쓰기의 흐름이  파괴된다고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알 때가 올 것이라고 본다. 어느 시기나 혼란기가 있지 않을까.  표현의 자유는 막을 수 없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쓰는 글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를 생각하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형이학적 표현이나 직설적 표현으로 심장을 뚫고 시가 주는 정서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느낌을 받는 것을 사실이다. 우리나라 시단에 아름다운 서정이 흐를 때 잠시 혼란에 빠졌던 시기가 사회참여가 강하게 어필할 때였다. 그러나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서정의 가락을 무시할 수는 없고 읽어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글, 대부분의 세계 명작도 그러하지만 그 핵은 서정이기 때문이다.  ”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문학하는 일도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시인은 실제 생명의 숲 국민운동 이사장이기도 하다. 몇 년 동안은 뚝섬의 서울 숲 나무심기 사업에도 동참하였는데 올  4월에는 나무를 심기위해 북한을 가야 하다고 한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또 꿈을 말한다. 독일의 베를린 문학의집, 함부르크 문학의집, 슈트트가르트 문학의집, 프랑크푸르트 문학의집을 모델로 하여 세워진 「문학의집. 서울」이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 어디나 생겨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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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란 이사장 약력 : 현재 「문학의집. 서울」 이사장. 시인. 1959년 현대문학에 ‘오늘을 위한 노래’외 두 편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14회 현대문학상 수상.  한국일보기자. 부산일보 논설위원. 최은희 여기자상 심사위원장.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등 역임. 2007년 삼성재단 비추미 여성 대상. 처녀시집「장도와 장미」외 10권 .첫 수필집「태양이 꽃을 물들이듯」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