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세월은 돌아올 수 없고 , 떠나버린 사랑 또한 돌아올 수 없기에 사람들은 대체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는 우리들의 이웃, 이끼와 온기가 묻어있는 골목풍경, 동네 어귀들, 누구나 겪었을 개발이란 미명하에 어디서나 불쑥 불쑥 튀어나와 만날 수 있었던 추억들이 더 이상 나올 곳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쓸쓸함과 허망함! 열 한 살짜리 앙큼한 소녀가 영진 삼촌에게 품었던 연정을 고백한 권남희의 수필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지 싶어 공감이 간다.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 월간 한국수필 ‘08. 5월호 수록 / 임옥진 비평 ( 에세이 플러스 2008.7월호 )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어 추억으로 묻혀버렸는데 내 소녀시절이 해체되었을 때 그만 비밀도 끝난사랑 이야기다. 이제 비밀이었다고 누군가에게 은밀히 말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흘러버린, , 속인스러워진 자신 때문에 맥빠지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
고향에 들를 때마다 나는 작가 그레이엄 그린처럼 내 사랑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어디에도 그 백색의 천진함은 찾아볼 수 없어 실망하기도 한다. 헐려버린 툇마루처럼, 붉은 고추를 갈았던 학 독이 믹서기에 밀려 한 구석에 박혀있는 것처럼 열적은 모습들이다. 그런데도 어린 날의 그림자조차 없는 고향집 개축한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혼자 발견하고 키웠던 사랑, 몰래 담아두었다 어느 날 스스로 깨트린 꽤나 뜨거웠던 마음을 만나려 애쓴다. 궂은 날이면 으례 갈라진 구들장으로 새어든 연탄가스에 두통을 내 방은 허물어지고 예쁜 포장 종이들을 담아 두었던 상자와 종이 인형들도 없어진 곳에서 나는 쓸쓸함 때문에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든 채 둘 곳을 못 찾아 허둥댈 때처럼 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안절부절한다. 대문 밖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곳이 없을까 나서보지만 나의 열 한살이 머물렀던 골목에서 나는 어디로든 집을 떠나 쏘다니고싶어하는 소녀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그 간질간질한 웃음소리를 만날 뿐이다.
그들에게서 아찔아찔함을 느끼며 나는 앙큼한 내 열 한 살의 속마음을 기억해내어 웃음짓곤한다. 변덕스럽고 유치한 소녀의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나를 키운 유일한 징표이기에 나는 가끔씩 찾아와 머물고싶어진다 .
그레이엄 그린(Grahm Green)의 ‘THE Innocent'란 소설을 보면 중년의 주인공이 고향에 남아있는 자신의 천진성을 찾아 잠깐 귀향을 하는데 모든 것들이 시간 앞에 속수 무책으로 파괴된데 대해 쓸쓸함을 갖는다 . 그러나 열렬히 사랑한 소녀와 같이 피아노 교습을 받았던 노부인의 집이 그대로 있는 것에 감회를 가지며 추억을 뒤지기도 한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했던 소녀와 같이 비밀 장소에 감춰 두었던 쪽지를 찾아 감동을 하며 펼쳐본다. 그러나 춘화같은 이상한 그림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실체에 회의를 가지며 돌아서고 만다. 사랑에 얽힌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려 하는 마음은 누구나 갖고있는 것일까 .
우리 집에는 영진이 삼촌이라고 불리는 스물 일곱 살의 청년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을 보면 삼촌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여자들은 모두 그를 삼촌이라고 불러 주었다.. . 어느 날 나는 그에게서 남자를 느끼고 말았다. 부드럽고 이지적인 분위기에 키는 처마와 견줄 만큼 컸는데 그를 흠모하게 된 것이다. 열한 살의 계집아이는 마음속으로 그와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며 그의 남성적 매력을 훔쳐보고 있었다.
날마다 계산해도 줄지 않는 그와 나이를 손가락으로 꼽으며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까지 그가 나이 먹는일을 멈추기를 기도했다. 자고 나면 자라는 내 키처럼 그는 내 가슴에서 내 꿈을 먹고 아주 신성한 존재로 날마다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른 채 나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로 동네 처녀들과 어울렸다. 그가 처녀들에게 우스개 소리를 하며 웃을 때마다 나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삭이느라 울먹이고 애꿎은 동생들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나의 존재는 그의 농을 받아주기에는 너무나 미미했다.
다 색시감 순위에서 아예 제껴져있는 내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느닷없이 넘어지거나 남동생과 싸움을 벌이고 훌쩍거리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남자, 아버지와 남동생, 사촌들과는 비교가 안되게 친절했던 그는 나를 안아일으키며 머리를 쓸어주고 씨익 웃었는데 나는 그가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믿어 버렸다. 그 후로 나는 영진이 삼촌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깜찍한 흑심을 품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어둑한 골목에서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영진이 삼촌이 분명한 남자가 동네 언니와 끌어 안은 채 가벼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흠칫 놀라 달아나면서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배신감으로 가슴을 후들후둘 떨었다. 그 때 처음 인간이 얼마나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인가 깨닫고 있었다. 그에 대한 환상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 한동안 나는 열병을 삭여야 했다. 아이들과 어울려 쏘다니고 패싸움을 벌이는 엉뚱한 사춘기를 겪으며 나는 변하고 있었다.
정작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소원대로 영진이 삼촌을 스물 일곱 살로 둔 채 고향을 떠나고 삼촌도 잊었다.
열한 살 소녀의 마음을 훔쳐서 영원히 떠나 버렸는지 이제 그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는 유리병에 넣어 강물에 띄운 편지처럼 꿈으로 남아 세상을 부유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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