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나무
권남희 (수필가)
휘뚤한 길 저만치 버티고 있는 오래된 나무를 본다. 나무를 대할 때마다 고향에 들어선 듯 어떤 안도감에 빠져든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났을 때 나는 헌칠민틋하게 자라버린 코흘리개 적 친구라도 만난 양 나무 밑둥치를 더듬고 우듬지를 올려보며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질렀다. 바람결에 흔들렸을 가지들은 이리저리 굽어져 휘우듬하지만 겉꾸림없어도 멋이 흐르지않은가. 노병의 훈장처럼 ' 500년 된 느티나무'라는 Y시의 확인 표지판을 앞세우고 있는 나무 아래서 옛일을 상상하기를 즐겨한다.
받침대에 의지한 채 양쪽으로 늘어진 가지는 동네 아이들이 꽤나 올라타고 장난쳤을 것같다. 밤이되면 늦도록 오지않는 가족들을 기다리는 장소로, 새벽이면 부지런한 농부 손에 마른 가지는 이슬떨이로 꺾여 나갔지 않았을까. 한더위에는 큰 그늘을 만들어 새 소리와 함께 낮잠자는 쉼터로 사람들을 불러모았음직하다. 나무의 가장 가운데로는 굳은 심지가 있고 마을사람들을 지켜주는 액막이, 바람막이로, 어머니의 기도를 받아주는 성소로 살아오며 간직한 웃음과 눈물이 보석처럼 박혀있을 것같다. ‘식물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정을 지닌 생명체여서 잘릴 때는 동물의 피에 해당하는 투명한 액체를 흘린다’고 영국 글레스코우 대학의 맬컴 윌킨스교수가 발표했었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이야기들을 삭정이처럼 떨어내면서 침묵하는 나무에서 범상한 기운을 느낀다. 천년이 넘도록, 더러 2천 년 넘게 살고있는 나무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나무에게는 오래도록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꿈꿀 권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날은 나무가 있는 이 길을 걷는다. 오래된 나무는 고향의 얼굴이다. 고향을 생각하며 찾아들 수 있는 문패다. 떠돌며 살아야하는 사람에게 나무는 위안을 준다. 문득 어느날 밤중에 택시를 타고 고향집을 찾아갔다가 눈 앞에 집을 두고 헤맸던 기억을 떠올린다. 가까스로 찾아낸 나의 집은 나무들을 뽑아내고 지어올린 아파트에 둘러싸인 채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엎드려있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오래 묵은 동구 밖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은밀하게 품는다. 휴일이면 시간을 내어 나무에게로 간다.
느티나무 아래서 꿈을 꾼다. 어딘가에 정착하여 죽을 때까지 나무를 심는 일이다. 장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 에 나오는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혼자 나무를 심어 나간다. 모두 떠나간 황폐한 마을에서 그는 도토리 씨앗을 뿌리고 자작나무 등을 심는 일에 골몰한다. 그는 기르던 양때와 개도잃고 나중에는 벌만 기르며 수십년 동안 프로방스의 황무지를 거대한 숲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지만 정작 부피에는 말하는 습관조차 잊을만큼 나무심는 일만을 사랑하다 죽어갔다.
집이 헐리면 꼭 나무도 없어지는 일을 겪는 결결이 백년도 함께 하지 못하는 서로의 만남을 생각한다. 어렸을 때 마당에는 몇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너무 잘자란다는 이유로 어느날 뽑아버리고 앵두나 복숭아나무는 벌레가 꼬인다며 과실도 맺기 전 처분을 했다. 마당에는 늘 새로운 나무가 심어지곤 했다. 그마저도 나무 한그루 없는 상가주택이 되었다.주택가에서 나무가 오래도록 살아가는 일은 사치다. 제법 정원의 풍모를 갖추었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바뀌고 노후생활을 위한 셋집용 다가구가 골목마다 밀집해있다. 밑절미를 빼앗긴 허전함과 함께 고향이 될 수 없는 도시의 공허한 가슴을 엿보고 만다.
언젠가 뚝섬에서 ‘내 나무 심기’ 행사가 벌어졌다. 마음으로 갈채를 보내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시집갈 때 잘라서 장농을 만들어주고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다가 아들이 죽을 때 잘라 관을 만들었던, 붙박이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소박한 행복을 생각했다.
느티나무에게 말을 건다. ‘ 천년을 살라’
오래된 나무가 있는 길 한 쪽으로 상가를 지을 거라는 풍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경고처럼 건설회사 팻말이 꽂힌다. 휘뚝하는 위기감이 몰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한국문인 ‘04년 10.11월호 포토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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