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2011.월간 한국수필 9월호 (호주세미나 안내)

권남희 후정 2011. 9. 6. 11:26

 

발행인 정목일이사장 . 편집주간 권남희 .사무국장 서원순 .기획실장 이철희/편집차장 김의배 .사진기자김수진.윤중일 미디어 담당 박원명화

정기구독 신청 532-8702-3  /신인응모 원고 이메일 kessay1971@hanmail.net

대관령 자연휴양림의 새벽

정 목 일(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이른 새벽 무렵, 대관령 숲속에 간 것은 나무들에게 무척 미안한 일입니다. 소중한 새벽 명상을 깨우지나 않을지 모를 일입니다. 나도 이때만은 가만히 숲속의 한 소나무가 되어 새벽 명상에 잠기고 싶습니다.소나무들, 그 하나씩의 편할 대로 취한 모습들이 안개 속에 희끄므레 수묵화(水墨畵)처럼 눈앞에 다가옵니다. 새벽에 만나는 광대한 수묵화 한 폭입니다. 나무들은 새벽안개에 잠겨 묵상(黙想)에 빠져 있습니다. 소나무들이 평생을 통해 취한 삶의 모습은 제 각각입니다. 하나도 똑 같은 나무가 없습니다. 구부정해 보이나 원만하고, 비스듬하지만 균형을 취하고, 옆의 나무들과 서로 온화하고 정답게 어울려 송림(松林)을 이루었습니다.소나무들은 각기 다른 모양을 보이고 있지만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드러내며 가장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산의 능선 같고, 강물의 유선(流線) 같고, 굽어진 논두렁 같고, 휘어진 활 같은 가지들이 공중으로 뻗어나가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화를 이룹니다.일생으로 터득한 삶의 미학이 선(線)들로 형형히 드러납니다. 달관을 넘어 깨달음의 경지를 가진 소나무들이 한데 어울린 아름다움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실로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고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장마로 불어난 계곡의 물이 콸콸 가슴을 타고 흐릅니다. 산의 만년 명상을 우려내서 흘러갑니다. 내 발자국이 물소리의 선율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빗물들이 모여서 흘러가는 행진곡을 듣습니다. 나도 한 방울의 빗물이 되어 계곡을 타고 머나먼 여행길에 나서고 싶습니다. 대지를 적시며 뭇 생명체에게 다가가 젖줄이 돼주고 싶습니다.물방울이 모여서 세상을 적시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는 어머니입니다. 나도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습니다.

나는 안개의 장막 속에 있습니다. 안개는 부드럽고 서늘한 촉감의 넓은 그물망으로 숲을 휘감아 그 안의 시공을 물방울의 영역으로 만듭니다. 안개의 그물망 안에서 소나무들, 물소리, 안개의 미립자(微粒子)들, 나까지도 안개의 영감 속에 빠져버립니다. 완전히 자연의 일부가 됨을 느낍니다.

안개 속에 있습니다. 나도 허공에 풀풀 휘날리는 한 알의 안개 미립자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투명하고 맑은 의식의 미립자가 되어 풀꽃들의 꽃술이나 잎에 살며시 내려 앉고 싶습니다.

국립 대관령자연휴양림엔 처음으로 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새벽 숲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수령 50년에서 200여 년이 되는 소나무들이 우거진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침을 맞는 숲의 명상……. 안개 미립자들이 내 머리카락과 옷과 살갗에 앉아 전하는 숲의 기도를 듣습니다. 아침 기도가 마음으로 젖어듭니다. 숲에 와서 이 세상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의 맑은 말들이 노래로 흐르고 있음을 압니다.

숲은 토질과 기후와 생존조건에 따라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줍니다. 오묘하고 탄복할만한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느낍니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균형을 취하기 위해 지상으로 일부를 드러낸 밧줄 같은 뿌리들, 밀집된 공간에 서로 부대끼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해 나간 기막힌 연출법과 미학에 놀랄 뿐입니다. 배려와 양보로 균형과 조화의 미를 획득한 삶의 방법에 경탄이 터져 나옵니다.

새벽 대관령 휴양림에 와서 숲속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여 마셔봅니다. 산의 만년 명상과 몇 백리를 흘러가 바다에 이를 계곡의 물과도 만납니다. 심 호홉을 해봅니다. 때 묻고 먼지가 자욱한 영혼을 씻어내고 싶습니다. 숲의 정기로, 뾰족한 솔잎으로 ,무딘 정서를 깨우고 싶습니다.

새벽 숲에는 맑음의 선율이 있습니다. 하루를 맞는 경건한 기도와 명상이 있습니다.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정화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깨끗하고 새로운 경이의 세계가 있습니다. 숲은 인간에게 말없이 삶의 의미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