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삽
권남희 수필가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아버지는 삽 한 자루로 집안의 모든 일을 해냈다. 밭을 만들어 그 밭에 오이, 토마토, 호박 등의 농작물을 심으면 신의 손길이라도 닿은 듯 잘 자랐다. 삽 한 자루로 못하는 게 없는 아버지였다. 농토를 불리고 집을 짓고 특수작물을 재배하며 우리 4남매를 가르치니 대단한 능력자였다.
삽은 무엇일까. 나도 아버지처럼 삽이 갖고 싶었다. 아버지의 삽은 열 살 소녀의 키를 넘으니 제대로 삽을 다룰 수 없지 않은가. 내 마음대로 땅도 파헤쳐 아버지처럼 밭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삽 한 자루 생기기를 속으로 바랬다.
아버지에게는 연장이 많았다.
비닐하우스가 한 동 지어진 마당 한 쪽에 농기구가 들어있는 창고를 염탐하곤 했다. 창고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연장들은 내 마음을 아는 듯 정렬한 채 나를 보았다. 내 공부방보다 훨씬 넓고 정리가 잘 되어있어 농사일에 바쁜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정리를 할까, 심지어 집을 짓던 중 굴러다니던 못까지 공구함에 가지런히 챙겨둔 걸 보고 감탄했다. 겨우 한 평 넘을 까 하는 내방에 책과 옷가지를 엉망으로 버려둔 나는 살림살이나 학습도구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도 했다. 곡괭이, 낫, 삼태기, 온실 문짝, 농약 통, 삽 몇 자루 등의 연장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아버지가 삽을 잡고 밭에 서있으면 근사해보였다. 아버지가 부지런히 삽으로 땅을 파헤칠 적마다 밭이 늘어나고 살림이 불었다.
어느 날 내게도 맞는 삽이 생겼다. 닳아서 쓸 수 없는 삽을 아버지가 내 키에 맞게 자루를 고쳐놓은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신이 나서 삽을 들고 땅을 골랐다. 특별히 땅을 고르면서 무얼 심어둔 것은 아니다. 화단의 꽃을 정리하고 두엄자리를 쌓아올려 봉분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 밭으로 나가기 전 아버지는 마당의 온실을 가꾸고 다른 채소를 심기 위해 삽으로 흙을 고르기도 했다. 늦가을에는 배추와 무를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설이나 정월 보름, 이른 봄이면 캐냈다. 양 손으로 삽을 잡고 힘주어 밀면 삽은 땅 속으로 쑥 들어가고 다시 흙이 뒤집혔다. 능수능란하게 삽질하는 아버지를 눈 여겨 본 다음 나도 삽질을 흉내 냈다.
분가한 형님을 대신해서 서당만 마친 후 십대 때부터 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아버지는 삽만 있으면 못할 게 없었다. 혼자 몸으로 북한을 탈출한 아버지에게 삽은 친구이고 고향 땅이고 마음속에서 만나는 가족이었을까. 모든 아픔을 묻고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면서 아버지는 죽을힘을 다해 삽질을 했다.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분명 ‘나는 혼자야, 외로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아버지 앞에서 삽을 들고 이리저리 땅을 파헤치곤 했다. 삽으로 흙을 파헤쳐 뒤집어 놓고 때로는 이랑을 만들기도 했다. 봄날 들뜬 땅은 삽질하기에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지난 시간들의 씨앗이 숨어있고 깊이 삽질하여 뒤집으면 미처 녹지 못한 겨울 한기가 엉켜 있다. 땅이나 사람이나 속을 뒤집어엎는 일은 후련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삽을 들고 땅을 파면서 아버지의 그림자처럼 따르던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와 달랐다. 아무리 삽을 잘 다루어도 아버지처럼 대지의 주인은 될 수 없었다. 곁눈질로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공부를 했다면 지금쯤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삽은 내 장화와 함께 창고에 슬그머니 가두었다.
나만의 연장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졸라 사게 된 카메라는 삽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팝송 음반을 사다가 듣느라 아버지가 마당에서 일을 해도 내방에 숨어버렸다. 내가 속한 세상의 연장들은 아버지의 삽과 비교할 수 없는 첨단의 이기들이었다.
내 이기적인 변절에도 아버지는 묵묵히 농기구를 친구삼아, 타고난 농사꾼처럼 이른 아침이면 삽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내 교복을 다시 맞추어 입고 교과서를 바꾸고 입학금을 낼 때마다 아버지의 삽도 새로 바꾸기를 얼마나 했을까.
대학 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와 거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시내를 어슬렁거리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아버지를 밤늦도록 마당에 서 있게 할 뿐이었다.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더위로 온 나라가 피서객들로 꿈틀거리던 날도 아버지는 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 집근처 건널목에서 과속차량에 치여 새로 장만한 삽도 부러지고 도시락과 함께 아버지의 온몸도 부서졌다. 뇌수술로 엉금엉금 꿰맨 흔적이 양쪽 귓가로 반원을 그린 채 퉁퉁 부은 아버지....... 처참한 마지막을 마주한 순간 나는 죄책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돌아가시면서도 일 걱정만 하다 숨을 거두었으니 아버지의 삶을 보상해 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장지에서 나는 아버지 관위에 흙을 뿌리려 삽을 들다가 정신을 잃었다. 아버지의 삽 한 자루 만도 못한 사람으로, 영원히 나는 어린 날 아버지의 능력있어 보였던 삽을 탐냈던 소녀로 남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도 해결하지 못 하는 얼뜨기 인생으로 삽질해야 하는 시간, 아버지를 땅에 묻고 절하면서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았던 것 같다.
A Shovel My Father’s Shovel
Nam-Hee Kweon
I wanted to have a shovel; I, a ten-year-old girl, was not tall enough to handle my father’s one. So I hoped to have my own shovel so that I could spade the soil or cultivate the wasteland skillfully with that shovel as my father did.
My father had many farming tools.
The tools were stored in a vinyl green house in the yard of my home. I stopped by the storage space from time to time. It was always in good order quite unlike my room. I used to look around inside with exclamation, “How does he take time out of his busy schedule to do this!” Even rusty nails derived from house repairing were laid in the toolbox neatly. Then I felt ashamed of me keeping my small room out of order with my clothes, books, stationary, and etc.
My father made a living just as much from handling farming tools skillfully: pickaxes, sickles, straw baskets, doors of green houses, agricultural chemicals sprayer and shovels. He raised his four children by growing special crops with several shovels.
In the early morning my father tended the greenhouse in the yard or made the ground even to alternate to other greens before beginning his daily work; at the end of autumn he buried cabbages and radishes to use them for the food for New Year’s or the day of the first full moon of the year by the lunar calendar. He held the shovel with both hands and pushed it hard, then dug up the ground. I kept my eye on his fluent shoveling and mimicked him.
He began farming just after ending village school instead of his oldest brother, who got married and moved out. Thanks to it there were few things he couldn’t do with the shovel. My father escaped
One day I received my own shovel that fit me; my father renovated a worn down shovel to my height. Returning home, I had such fun leveling the ground with the shovel. I didn’t work the spade to plant but to take care of our flowerbed or pile up compost heap.
Whenever I was tired of studying, I used to pass time shoveling. However, after going to high school, I came to have a different idea: I don’t want to be a manager of Mother Earth like my father, even if I would be good at shoveling. Taking a glance at my father’s skillful shoveling, I talked to myself, ‘if my father studied earlier, he would have been something by now.’ I felt sorry but I took my shovel to the shed with my rubber boots and began being absorbed in my own other tools: my camera which was bought after begging my father was far better than the shovel, playing the pop song album confined me to the room leaving my father outside alone. My tools were good modern conveniences, better than my father’s.
Seemingly born to farm, he kept plowing a lonely furrow regardless of me fulfilling my selfish needs. How many times did he replace his shovel as my school uniforms changed and enrollment fees were paid. I became estranged from my father after I entered college. My father waited for my return till late at night in the yard, while I hung around downtown with boys.
Even when all the summer resorts were crowded with people in the hottest weather of the decade, my father rode his bicycle to go out to the field with a shovel and lunch box. And on his way home he had a car accident, and his body was broken as well as his shovel. In the end he died worrying about his farm work and the sorry sight made me overwhelmed by feelings of guilt.
On his funeral day I nearly lost my mind as I was about to put some soil with the shovel on his coffin. I, who wanted to have my own shovel in childhood, never did repay my father even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As a fool, no better than a shovel of my father’s, wasting my time shoveling poorly as ever, I sat for a long while absentmindedly on the hill after burying my father.
영역 라이채 덕성여대 영문과 졸업. 한국문인 번역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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