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향기 침향沈香의 세계를 추구하는 정목일 선생님
권남희수필가(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끈입니다. 티끌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우주의 시작도 입자가 아니라 끈이라는 추측에 탄력을 받아 오로지 문학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을 잡아다녀 봅니다.
지난 유월 대표에세이 부안 세미나를 가는 버스 안에서 저는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
‘정목일 선생님이 문단 대 선배였는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 오셔서 이제는 직장 상사가 되었습니다.’
문우들은 ‘직장상사’라는 말이 생소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문우들끼리 뭘 그러냐?’는 식의 농담을 던지고 가볍게 받아들였습니다.
만남은 늘 그랬습니다.
언제나 선배와 후배로 문학세미나와, 정기총회에서, 연말행사나 선후배 작가들의 출판기념회에서 얼굴을 비추곤 했던 우정들이 쌓여 결국 문학 세계에서 새로운 틀을 형성했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도 길이 있어 서로 다른 정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동시대의 수필문학 지도를 그리고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좌충우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늠할 수 없었던 긍정적 관계 확대가 문학이라는 끈을 통해 30년 사이에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꽃들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는 것같이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막 등단했던 1987년 선생님은 벌써 1975년<월간문학>과 1976년 <현대문학>에 등단하여 ‘문학지 최초의 수필 등단’이라는 별칭에 대표에세이동인 창립회장도 역임하였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남신문 편집부국장을 맡고 경남지역 수필문학회를 이끌고 있는 대선배로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운 문학 선배였습니다.
선생님은 결코 선배라고 내세우지 않는 부드러움과 조용한 성품, 맑은 물의 무심한 카리스마를 풍겼습니다. 당시 문단선배는 후배들이 가까이서 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갖고 있었습니다. 전국규모의 행사 때면 후배들은 선배들에 대해 어떤 장르의 작가인지, 어지간하면 작품 한 두 편은 미리 읽고 알아서 대해 드려야 도리였습니다. 또 그것은 후배들이 갖춰야 할 미덕 중의 하나였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일 수 없고 맞담배질을 나무라는 집안어른들처럼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선배작가에 대해 ‘ 누구냐? 어디살고 무엇을 쓰는 작가냐?’ 물었다가는 그 무례함에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누가 내 작품을 읽겠어’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대충 썼다가는 틀림없이 세미나 현장에서 선배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경계가 허물어져 선배가 후배에게 자신을 알려야 할 정도로 달라진 요즈음 문단풍경과는 격조가 다른 세대였습니다.
선생님이 있는 곳에는 당연히 수필이 따라 다녔습니다.
선생님은 무심한 듯 모르는 듯 늘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지만 선생님이 움직이는 시간과 장소에는 수필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가까이서 선생님의 수필사랑, 그 현장을 보면서 작가이름을 걸고 있는 후배로서 심히 부끄럽기도 하여 게으름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외국 세미나 때도 늘 메모하고 현장을 살피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여행 내내 선생님과 룸메이트를 했던 후배작가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듯 글 쓰는 선생님의 모습에 놀라 아침식사 자리에서 뉴스로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들은 여행 떠날 때는 떠나는 기분에 들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소재가 너무 뻔하고 시시하다고, 소소하다고. 너무 술술 풀려서, 이미 다른 사람이 썼기 때문에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글 쓰는 시간을 멀리해 왔습니다. 얼마나 프로답지 못한 자세인가요?
화가 김점선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마추어는 안 그려도 되지만 프로는 매일 그림을 그려야 프로다. 그릴 게 없을 때는 전날 그렸던 그림을 그대로 또 그리면서 자신을 혹독한 시험대 위에 올린다.”
문우들은 세미나 뒤풀이에서 일 년 동안 별러왔던 흥을 풀어내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선생님은 노래 한수도 치지 않은 채 오직 수필쓰기를 말했습니다. 문우들은 총회 때마다 선생님의 노래를 듣기위해 애를 썼지만 이미 오래전 포기하고 말았지요.
선생님은 수필 속에서 그냥 그대로 산이고 나무이고 흐르는 강물일 뿐입니다.
선생님의 글 속에 나타나는 자연들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어 바람소리, 대금소리, 차 한잔의 향기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아침에 피어난 나팔꽃, 호박꽃에 경배하고 싶어하는 작가적 바라봄이 시간과 결합하여 사람들 마음을 열게 하고 평화를 선물하는 지도 모릅니다.
바람소리에도 빗방울에도 문살에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담아 테마에세이집『한국의 영혼』을 출간하여 보내주었을 때는 한국의 전통이 무엇인가를 구도자의 모습으로 보여주었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날 <침향沈香>수필을 읽다가 선생님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향기를 간직하는 썩지 않는 나무 사리같은 수필향기를 지니고 싶어 하였습니다.
.......나는 가끔 침향을 생각하며 그 향기를 꿈꾼다. 과연 무엇이 1천년 동안 썩지 않고 향기로울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날수록 퇴색되지 않고 더욱 향기로울 수 있단 말인가. 침향이야말로 영원한 향기가 아닐까. 땅속에 묻혀 아무도 모르게 버려졌던 나무토막이 1천년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니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도 향기를 간직할 수 있을까. 땅속에 파묻힌 듯 침묵으로 다스린 인내와 인격속이라야만 향기가 밸 수 있으리라. 어쩌면 땅속에 묻혀 썩을 것이 다 썩고 난 다음, 썩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영혼에 나타나리라. 나는 꿈속에서도 가끔 침향을 맡으며 삶속에 그 향기를 흘려보내고 싶어한다. .....수필 <침향>에서........
사석에서 선생님은 사교적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말을 언뜻 비추었지만 이미 선생님은 천년향기를 감추고 있다 여깁니다.
선생님의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 고요의 세계는 거꾸로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 문학의 운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월당 故 조경희선생이 이끌어왔던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직을 이철호(한국문인발행인)선생님.유혜자 선생님 다음으로 맡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을 마련하고 문학상을 유치하고 문학행사를 치루고, 소외되어있는 지역 수필가들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선생님은 이제 고요히 명상에 잠겨 글만 쓸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렸습니다.
그 형상은 마치 해안의 바위가 파도에 단련하는 모습입니다. 끊이지 않는 파도가 밀려와 바위를 치고 떠납니다. 파도는 형태를 달리하여 쉬지 않고 바위를 때리고 물살로 덮치고 거품을 올리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합니다. 그 어떤 형태도 이루지 못한 채 없어 아우성치는 파도 속에서 침묵의 세계를 굳히며 이제 천년의 소리를 들려줄 시간인 것 같습니다.
2011년 문학의집.서울 소식지 7월호 수록
권남희 수필가
1987년 월간문학 수필등단 . 현재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수필집 『미시족』『시간의 방 혼자 남다』『어머니의 남자』『그대 삶의 붉은 포도밭』등
덕성여대평생교육원.MBC아카데미 잠실 .분당 홈플러스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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