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2011년 4월 문학의집.서울 낭독행사 수록작품

권남희 후정 2012. 3. 4. 17:18

2011년 4월  문학의집.서울  낭독행사  수록작품

봄, 그리움을 캐다

권남희 수필가(월간 한국수필편집장)

큭 ! 눈물이 솟구치는 봄이다. 입맛을 잃어버린 봄날, 도무지 따분하기만한 볕에 나를 쪼이고 앉는다. 고향을 떠나는 게 아니었어....... 이유도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봄이다. 봄이면 습관적으로 삶의 동굴 어딘가에 동면冬眠으로 묻힌 그리움을 캐기 시작한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열아홉 살 봄날의 흔적을 따라 호미질 한다. 추억을 캐는 나의 호미도 닳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디어지련만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나의 호미날은 더 빛이 나고 날이 선다.

‘이 도시를 떠날 거야’

삶의 속도가 너무 느려 변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도시가 촌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떠나버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몇 바퀴를 돌아도 택시요금은 기본요금이고 삼십분만 걸으면 만난 친구 또 만나게 되는 거리가 도시란 말인가! 일탈을 꿈꾸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동네, 여름이면 집집마다 피어나는 채송화, 분꽃, 과꽃 들의 종류까지 똑같은 풍경, 갈 곳 마땅치 않은 고향에 진저리치며 서울이모가 풍겼던 세련된 차림새와 말씨에 동경을 품었다. 서울 처녀는 모두 피부도 하얗고 다이어트를 하여 날씬하다는 충고가 나를 잡아 다녔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시간이 버스표 한 장으로 실체가 드러나고 생각만 해도 설레던 가슴이 두근댐으로 바뀐 채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와 주고받던 편지들, 책, 배를 깔고 책을 보던 아랫목, 사랑하는 동생 재희, 준길. 양욱과 단짝 친구 윤자, 명애....... 실컷 먹다 행복감으로 취하게 했던 계절 과일들, 나의 도시락을 싸주던 설이.

모든 것들을 둔 채 나 혼자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내가 들고 가야 할 가방을 보는 순간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행복을 두고 정말 떠나는 것일까.

지방대 입학을 앞둔 S오빠는 마치 나의 마지막을 보기위한 것처럼 달려와

‘ 서울여자가 되면 날 안 만나겠지?’ 서글픈 말 가락,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숙집을 구해주고 입학식까지 봐주기 위해 동행해야 하는 어머니는 무엇이 못 미더웠을까. 짐 보따리를 묶을 때마다 다른 덕담은 생각나지 않는지 ‘남자 조심하라’는 경고장만 딱지처럼 내 가슴에 자꾸 붙였다. 꽃샘바람이 자꾸 내 몸을 감았다.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자

말없이 담배만 피우던 아버지는 곡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가 정월 보름날 캐고

남은 배추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울컥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나는 뒷걸음질 치며

편지할게요’ 소리쳤다.

그렇게 나는 열아홉 개 나의 봄을 고향에 묻어둔 채 영영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