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헌정 7월호 수록 (대한민국 憲政會 월간 헌정 .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權南希 수필가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어떤 정서,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랑이나 상처나 그리움을 노래가 건드려 줄 때 눈물을 흘리고 만다. 눈물을 보일 때는 가장 순수한 마음상태로 돌아가 있거나 수많은 껍질로 포장된 채 여간해서 나오지 않는 진정성을 꺼내주기 때문이다.
아들이 돌도 되지 않았을 때다.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한참을 몰두한 채 듣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누가 울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우리는 깜짝 놀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말도 할 줄 모르는 아기가 그 곡에 흐르는 감정에 이입되어 눈물샘이 터진 것이다. 모차르트 음악을 듣고도 엉엉 울었던 아기였기에 음악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감탄을 하고 말았다.
애국가의 본질은 민족에 대한 깊고도 진실한 사랑이다. 때로 사람들은 본질을 잊고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평할 때가 있다. 본질은 강 밑바닥처럼 잘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조용하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사랑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바탕에 깔려있고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사랑처럼 보통 때는 무심하게 지나간다. 공기처럼 애국가는 민족의 숨결이어서 그 중요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듯, 잘 피어나기를 꿈꾸며 꽃에 물을 주듯 그렇게 늘 일어나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도 아니기에 소홀한 부분도 있다. 애국가에 들어있는 부모 마음을 놓치는 것은 강요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애국가 앞에서 철없는 자식들은 기분에 따라 거부하고 수시로 짓밟는다.
한동안 어떤 종교에서 교리를 따른다며 애국가를 부르지 않아 학교에서는 문제를 일으킨다하여 학생들을 퇴출하기도 했다. 사랑의 수혈을 거절했던 그들, 민족이 흘린 피와 눈물과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응축되어 있는 애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누구였던가.
나의 학창시절에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조회시간은 물론 아침 태극기 게양할 때와 하기식 때 애국가를 틀어주었다. 그 시간에는 어디에서나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어딘가에 있을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며 의식에 잠시 동참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 때마다 웬지 모를 장엄함이 온 몸을 감싸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시 예전처럼 애국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갖게하는 방법도 좋을 것이다. 아침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바쁘다면 점심시간 후 쉬는 시간은 어떨까.
애국가는 민족의 꽃이기에 날마다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할 필요도 있다. 최면 걸듯 자꾸 불러주어야 사랑하는 마음도 솟아난다. 노래 좋아하는 우리민족이 애국가 부르기를 마다할 리 없다. 한국인은 노래 앞에서 한 마음이 된다. 전국적으로 , 세계 어디서든 만남은 으레 노래로 시작하고 노래로 풀어나가고 노래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슈퍼스타 K 오디션을 시작으로 매체마다 오디션 열풍인 이유도 노래를 사랑하는 기질에서 비롯되었다. 한류바람을 K-pop으로만 밀어줄 것이 아니라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오디션이나 퍼포먼스를 국제적인 행사로 키워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
조선조말 고종황제도 노래 좋아하는 백성의 기질을 일찍이 파악하였다. 국민의 사기를 드높이고 충성심 고취와 애국을 위해서는 노래만한 게 없다 하며 國歌를 제정하여 널리 펼치라고 하였다. 1902년 8월 15일 공표된 대한제국애국가는 당시 여러나라 외교사절단 앞에서 오케스트라로 공연되어 박수를 받았다. 현재 부르는 애국가는 아니지만,‘외세들에 시달리는 우리황제를 도와주십사’하는 가사가 절절하다. ( 상데(上帝)는 우리 황데를 도으사/ 성슈무강하사.해옥듀를 산갓치 싸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뜰치사/오천만세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서 -생략-) 작곡자는 그 당시 군악대장으로 초빙되어 왔던 프러시아 제국 황실 악단 지휘자 트란츠 에케르트였는데 불행하게도 일본에서 오래 활동했고 일본국가 <키미가요>를 작곡한 이유로 조선의 國恥와 함께 사라졌다.
‘애국가는 國歌가 아니다’며 애국가 부르기를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이석기 의원의 황당 제스쳐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감지하는 것은 왜일까. 정치에서도 노이즈마케팅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다. 가장 큰 것을 건드리고 흠집내는 일은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야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신의 애국심을 보여주고싶다면 얼마든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법도 많을텐데 굳이 그렇게 ‘독재정권 운운’하며 공격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역할모델을 해야 할 정치인이 기본기를 갖추지 않고 시합하는 운동선수처럼 성숙하지 못한 사고로 실망을 주어야 하는가. 애국가는 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에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애국가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고있는 이 땅처럼 전 국민의 재산이다.
현재의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우리민족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큰 뜻을 품고 세계 40개국의 국가를 참작하여 창작해냈다. 그 후로 애국가는 상해임시정부와 재미동포들에게 보내져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요원들이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고국땅이 보이는 순간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여 착륙할 때까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이처럼 애국가가 탄생하고 애국가가 성장해온 배경에는 늘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눈물과 목숨과 한이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애국가 1절 앞부분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또한 절대 환경이 좋고 평평한 땅에서만 살아가는 소나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당시 바위에 뿌리를 박고 살던 남산의 소나무, 어떤 어려움에도 뿌리를 내리는 참을성 많은 소나무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남산의 소나무처럼 우리 민족이 숱한 고통을 견디고 이루어내리라는 것을 예언한 노래다.
6.25 참전용사로 왼쪽 허벅지까지 폭탄에 날아가 의족을 끼운 채 농부로 살았던 나의 아버지를 보면 꼭 바위에 뿌리를 내렸던 소나무라는 생각을 했다. 강한 생활력으로 가정을 일구어 전체 상이용사에 모범이 된다하여 국무총리표창까지 받았는데 시상식 때 아버지는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 때 아버지의 눈물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를 생각했을테고 두고 온 가족들이 가슴터지도록 보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가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남산의 저 소나무’였다. 애국가를 부르며 힘을 얻고 무언가 비장한 결심을 하고 살아갈 메시지를 받았던 것이다.
어디에서도 이제 애국가 부르기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놓친 것들이 있다. 애국가는 반짝 유행을 탈 때 사랑하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귀한 것은 거슬러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늘 그대로 기다려주는 자체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 잠깐 귀를 열어 애국가를 4절까지 들어보고 불러보는 일도 애국의 방법이다.
권남희 약력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 현재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덕성여대평생교육원 .MBC아카데미 잠실과 강남점에서 수필강의
수필집 『그대삶의 붉은 포도밭』『육감&하이테크』등 5권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 제 8회 한국수필 문학상 stepany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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