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낭만 도시 여수를 문학적 고향으로 삼아 수필에 운명을 맡긴 정호경수필가 그 문학의 뿌리를 만나다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일시 : 1월 20
장소 :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
정리 : 편집주간 권남희 (011-412-4397)
왼쪽에서 두번째 유혜자 전 이사장 세번쩨 정호경 수필가.오른쪽으로 이정림 수필가
鄭木日 : 누구나 시작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문학으로의 첫발을 내딛게 된 선생님의 인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鄭鎬暻: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 마루에 굴러다니던 이태준의 단편집 <돌다리>에서부터 오늘의 내 운명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 후 중학시절 문예반에 있을 때 이태준, 박태원, 홍명희, 한설야 등의 소설과 정지용, 김소월, 임화, 김기림, 백석 등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설익은 습작시를 ≪중학생≫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는 본격적으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등단은 2∙3회를 거쳐야 하는, 어려운 관문이긴 했지만, 내 딴에는 심혈을 기울인 수작이었는데도 눈이 어두운 심사위원들의 실수로 낙방을 해 고민하다가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다시 시작했지요. 그러나 학교의 벅찬 직무 속에서 시간을 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 뒤 지방에서 서울로 학교를 옮겨 재직하고 있던 중 우리나라에서 순수한 수필지로서는 처음인 ≪隨筆文學≫(1972)을 창간한 친구 김승우, 김효자 내외분의 권유에 따라 나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수필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인 1973년에 <陸橋附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수필활동을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의 등단작품을 들라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이‘육교부근’을 내세웠는데, 광화문 교육회관 앞에 서 있던 이‘육교’가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되면서 내 등단작품도 함께 자취를 감추어버렸으니 나의‘명작의 고향‘을 찾을 길이 없게 되어 안타깝고 마음 허전합니다.
40년 동안의 서울생활에서 마지막 직장이었던, 입시학원인‘대성학원’에서 열심히 일하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내가 서울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쉰 다음 이삿짐을 싸들고 곧장 여수로 향했어요. 6∙25를 전후한 대학 재학시절 아버지의 장삿길 따라 10여 년을 여수에서 살던 때 가끔씩 선창가에서 본 풍경이긴 했지만, 봄바람에 나부끼는 연분홍 인조치마 아가씨가 서서 손수건을 흔드는 연락선의 이별 풍경이 한평생을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고향도 아닌 여수를 다시 찾게 된 것이 내 남행의 이유였어요. 서울의 휘황찬란한 백화점 쇼핑을 포기하고 선뜻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가 고맙기도 했지만, 지금 나의 아내는 시골 재래시장의 장보기 재미에 여생을 걸고서는 여수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서울 있을 때 출간한 수필집은 맨 첫 번째의 ≪까마귀야 까마귀야≫ 하나뿐이고, 나머지 ≪폐선≫을 비롯한 4∙5권의 수필집은 모두 여수에서의 산물이니 이곳은 내 문학생활의 텃밭이요, 고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원래 도시체질이 아니어서인지 서울의 매미 떼처럼 들끓는 자동차들보다 시골 논바닥에서 교대로 등에 기어올라 말 타기 놀이하는 개구리들이 더 좋았고, 예쁘게 장식한 케잌보다는 시루떡이나 쑥떡이 더 정겨웠기에 여수는 어쩔 수 없이 내 문학의 고향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건강이 안 좋아지니 자식들은 자꾸 서울로 옮기라고 하지만, 싱싱한 꼬막이며 바지락, 그리고 향긋한 섬 나물들을 두고 떠날 수 없는 오늘이 나의 팔자요, 나의 운명임을 압니다. 오늘도 나는 먼 어장에서 돌아오는 어선을 따라 날아드는 갈매기들의 목마른 낭만을 구경하며 서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수필이고, 나의 문학인지 모릅니다.
정목: 여수지역문단의 활성화와 (여수수필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선생님의 연결고리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정호:여수로 내려온 해가 1998년 9월이었으니 올해가 14년째입니다. 여수 출신으로 대부분의 순천중학 동기 친구들은 서울로 가버리고 줄곧 남아서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친구들과 소일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여수수필문학회’ 류홍석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던 수필가 아무개가 여수로 이사해 갔으니 함께 활동하면 어떻겠느냐는 <에세이문학> 박연구 주간에게서의 친절한 전화를 받았다면서 나한테 가입 의사를 물어 왔기에 시작한 것이 이곳으로 옮겨온 2년 뒤였어요. 가입하자 분에 넘치는 회장직까지 맡아 줄곧 8년 동안을 함께 일하면서 말 그대로 여수수필문학 저변확대를 위해 내 딴에는 전력을 다한 보람인지 ≪여수수필≫의 작품 수준이 많이 향상되어 흐뭇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일정한 장소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필지망생들도 문단에 등단하는 대로 ‘여수수필문학회’에 가입시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던 중 한 회원과의 사소한 감정충돌로 인해 나는 그만 의욕상실이 되어 그 모임에서 탈퇴해버렸지요. 그랬더니 나와의 인연으로 가입한 많은 회원들도 뒤따라 빠져나와 다시 우리끼리 모여 공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수는 다른 지방에 비해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각보다는 저조한 편이며 특히 수필에 대한 인식이나 관심도는 더 떨어지는 편이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며 현실입니다. 그런 중에 나는 여수 수필문학의 지속적인 저변확대를 위한 한 방법으로 이곳 지방신문에 졸작이나마 수필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일반인들의 수필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화도시로서의 내 고장 여수를 위해 나의 수필 창작활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정목: 월당 故조경희 선생과의 인연에 얽힌 일화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호: 초창기의 ‘한국수필가협회’에는 나도 당당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입시학원에서의 쉴 새 없는 강의 때문에 문학행사에 참석도 못 할뿐더러 회비 납부에도 불성실하여 자퇴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순진하고 양심적인 회원이었던 것 같아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회비는 몇 년분이나 밀렸으면서도 문학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먹을 것은 다 챙겨먹고 유유히 사라지는 회원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에세이문학≫은 내 모교와 같은 곳이어서 가능한 한 행사에 참가하다 보면 조경희 선생을 종종 만나 뵐 수 있었는데, 대개의 경우 이숙 선생과의 동행이었습니다. 조 선생은 말투가 좀 무뚝뚝한 편이어서 말붙이기가 어려워 인사 정도로 끝나는 편이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조경희 선생의 말씀이라면서 이숙 선생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창작지원금 신청에 관한 의사타진 건이었어요. 나는 웬 떡인가 하고 좋아했는데, 자세한 것을 알아보고 다음에 다시 알려 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 뒤 한 달이 더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 와서 서울에 있는 자식들의 무슨 급한 전화인가 하고 놀라 얼른 받아보니 이숙 선생의 전화였습니다. 대뜸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자택인가 아니면 셋집인가를 묻기에 자택이라고 했더니 셋집에 사는, 생활이 어려운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창작지원금이라면서 “그렇다면 어렵겠네요.”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지 달팽이도 집이 있는데, 무슨 뜻일까 하고 종일 생각해 봤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문제는 끝내 풀리지 않았지만, 불쌍한 정호경을 도와주기 위한 조경희 선생의 따뜻한 배려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어요. 이제는 저도 먹고 살 만하니까 제 생각은 잊으시고 편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정목: 현대수필문학상을 선생님과 같이 받았을 때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진주여자고등학교에 재직했던 선생님과 당시 진주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제가 다시 문학에서 특별한 만남으로 시작했으니까요.
정호: ‘현대수필문학상’을 정목일 선생과 함께 받은 해가 오래된 일이어서 갑오경장 때였던가? 하고 상패를 찾아 확인해보니 1995년 3월 31일이었네요. 수필문학진흥회(에세이문학)에서 주는 문학상으로 17년 전의 일입니다. 나는 등단 이후 처음 받는 문학상이어서 서울에서 살고 있는 진주여고 제자들이 소식을 알고는 많이 참석해 꽃다발을 무더기로 안기며 축하해 주었어요. 정목일 선생과는 같은 날 같은 상을 받게 된 인연 이전에 벌써 진주에서부터의 오래된 인연으로 끈끈한 관계가 암시되었네요. 내가 진주여고에 재직한 해가 1959년에서 1964년까지 만 6년 동안이었으니 그 무렵 정목일 선생은 바로 옆의 진주고등학교에 재학하는 고2 아니면 고3 학생으로 진주여고 학생 친구도 많았다니 사실상 제자 아닌 제자의 관계라는 말을 2004년 1월, 내가 ‘신곡문학 대상‘을 받을 때 정목일 선생의 축사에서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진주여고 재직 시절은 내 일생의 황금기라고 할 정도로 즐겁고 행복한 때였습니다. 국어시간에 딱딱한 교과서는 제쳐둔 채 정서교육을 핑계로 한 시와 소설 감상으로 일관했으니 봄바람에 가슴 부푼 여고생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교장선생 눈치를 봐가며 입시공부도 열심히 하여 우수대학에 많이 합격을 했으니 내 할 일은 다한 셈이지요. 그 뒤 나는 서울로 학교를 옮겨가 있으면서 진주여고 출신들의 이런저런 동기동창모임에 번번이 초대를 받아 함께 즐기다 보니 내가 진주여고 졸업생으로 착각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름은 여자 이름이지만, 나는 남자입니다.
정목: 일각에서의 수필문단의 여성화와 신변잡기의 범람 우려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정호: 문학은 지적인 두뇌보다는 정서적인 감성 쪽이고 보면 작품의 질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수적인 면에서는 역시 여성 쪽이 다수가 아닐까 싶네요. 먼저 시가 그러하고 소설은 시보다는 덜하지만 이도 적지 않은 숫자이고 보면, 같은 문학으로 수필이 또한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필의 경우에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비단 수필뿐인가요. 시는 우리 문단에서도 남녀를 합한 숫자가 수필보다 월등할뿐더러 여성의 숫자만으로도 수필보다 많은데, 왜 수필만의 여성화가 문제시되는지요. 여기서도 텃세가 말을 하는 것인지요. 시는 문학의 모태이고, 수필은 다른 여자가 업고 들어온 천둥이가 아닐진대 이제 우리는 그릇된 고정관념과 촌티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구태여 수필의 질을 문제 삼는다면 우리도 할 말이 있습니다. 수필이 여성화하고 신변잡기라는 것이 꼭 문제가 된다면, 시의 여성화와 운문으로 쓴, 난해한 신변잡기는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합니까. 기왕 화제가 된 자리이니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은 남녀를 막론하고 특히 문제 삼는 시나 수필의 여성화의 경우, 중고시절의 문예반에 대한 미련과 향수를 달래기 위한 한풀이의 한 방법으로 시작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이는 각자가 자각할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에 대한 실언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정목: 은퇴한 문학청년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작가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문학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말을 부탁합니다.
정호: 문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작품 또한 말할 여지도 없는 주제에 후진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문학은 괜한 겉멋이나 단순한 취미로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에 첫째 문학에 대한 자기 소질을 확인한 다음, 국내외의 문학자품을 섭렵하여 기반이 튼튼히 다져진 연후에 작품 창작에 임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욕심만일 뿐 문학에 대한 소질이 안 보이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른 길을 얼른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문학예술에서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두고두고 말하던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도 아무 의미가 없는 농담에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정목: 본 협회는 전국의 수필가들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지만 미진한 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수필가협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호: 한국수필가협회는 이름 그대로 한국의 수필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모임이어서인지 회원 수도 많을뿐더러 회원 상호간의 친목도 좋아서 지나다가도 한 번 들르고 싶은 수필가들의 따뜻한 사랑방입니다. 이 사랑방에서 주고받은 정담과 꿈을 정성들여 묶어 펴내는 수필지가 ≪한국수필≫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이전 유혜자 선생이 이사장 시절 ‘나의 등단작과 대표작’을 큰 글자로 돋보이게 실어 주셨으니 나 개인적으로도 더욱 정이 가는 곳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수필가협회’와 ≪한국수필≫이 더 좋은 소문으로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필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써 보낸 원고에 금일봉의 답례를 배려해 주신다면, 모두들 더 좋은 글을 써서 보낼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한국수필가협회’ 정목일 이사장의 사랑방에 밝고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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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경 약력
경남 하동 진교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수필과비평 에세이스트 편집고문
수필집. <폐선> <현대의 섬> <오늘도 걷는다마는> 외
수상. 현대수필문학상. 한길문학상. 신곡문학 대상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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