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2013년 월간한국수필 4월호

권남희 후정 2013. 4. 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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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鄭 木 日 수필가( 한국문협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봄비는 아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같고 눈동자 같다. 한 없이 선하고 맑아서 미소가 번져온다. 간지러운 입김으로 세상 모든 것들의 귀에다 속삭인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기억을 깨우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낸다. 누구라도 세상에 홀로 떠도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려 준다.

  봄비 속엔 모두 닿아 있다. 생명체로서 함께 있음을 느낀다. 나뭇잎 밑에 숨은 도토리, 온몸으로 언 땅을 열어 제치는 씨앗들, 나무들 속에서 숨죽이는 곤충의 알들이 봄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봄비처럼 거룩하고 은혜로운 배달부가 있을까. 보이지 않은 가방 속엔 신비와 경이의 선물들로 가득 차 있다. 봄비는 천지를 감동시키는 연주자이거나 천상의 시인이다. 가장 부드럽고 다정하게 생명의 찬가를 연주한다. 아무도 모르게 초록빛으로 천지를 개벽시키는 놀라운 위용이여.

  봄비는 단절과 고독 속에 지내던 존재들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편견과 이기의 벽을 허물고 모든 생명체가 함께 연관돼 있음을 느끼게 한다. 풀과 나무가 존재하고 있기에,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홀로 살 수 없는 세상임을 알게 해준다.

  봄비는 하늘에서 생명의 편지를 갖고 온다. 세상을 깨우는 복음을 전해준다. 소리 없는 초록의 혁명이다. 일제히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도록 손을 내민다.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전파한다. 생명의 깃발을 들고 나갈 길을 가르쳐 준다.

  봄비가 내리면 한 알의 씨앗이고 싶다. 다시금 탄생하고 싶다. 실버들의 잎눈이고 싶고, 땅을 여는 뿌리이고 싶다. 드디어 꿈의 씨앗을 발아시키고 싶다. 세상을 바꾸려면 두 주먹을 쥐고 일어서야 한다.

  봄비는 당신이 선 자리가 비록 바위나 절벽이라고 할지라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네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없다고 말한다. ‘이란 보이지 않은 것을 보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보이는 것은 평범하고 보통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가치로운 것이다. 진실, 우주, 중심, 영혼, 영원, 진리, 마음은 보이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다. 형체가 없지만 더 없이 고귀하다.

  봄비는 따뜻하다. 생명의 피가 돌고 온기를 전해준다. 무엇이 이처럼 감화와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을까. 천지조화와 이치를 알려주는 봄비처럼 은혜로운 모습이 또 있을까. 천지 만물의 혼백을 깨우는 손길!

  봄비 속에선 살아있음의 희열을 느낀다. , , 공기, 생물……. 모두가 함께 있어야 할 공동체임을 깨닫는다. 나도 허물을 벗어버리고 싶다. 봄비가 보내온 깨알 같은 편지글엔 사랑의 축복이 가득하다. 어서 깨어나라고 속삭이고 있다.

  날개를 달고 싶다. 새잎을 피워내고 싶다. 잎망울 꽃망울을 달고 싶다. 초롱초롱 초록 잎새를 달고, 꽃을 피워내고 싶다. 그래야 나비가 오고 새들이 노래할 게 아닌가. 천지가 새로워질 게 아닌가. 봄비의 축복 속에도 무감각하게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늘이 기회를 베풀고 있다. 깨달음의 새 움을 피워내야 한다. 세상 만물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깨어나야 한다. 심장을 쿵쿵 울리는 봄비의 초록빛 생명의 말! 마음을 울리는 영혼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