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월간 한국수필 2013년 2월호

권남희 후정 2013. 2. 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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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에세이

마당

정 목 일수필가(한국문협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

 

한국인에게는 마당 깊은 집을 갖고 싶은 소망이 있다. 기와집이면 좋고, 초가 삼 칸이라도 마당만은 넓었으면 했다.

마당은 집과 집, 건물과 건물, 실내와 바깥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과는 달리 의식주 생활에 관계가 되고 다목적인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농가에는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다. 앞마당은 바닥이 평평하게 잘 다져진 곳으로, 주로 관혼상제 때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깔아 많은 사람들을 접대하거나, 추수 때 곡식을 타작하고 건조하며 더운 여름에는 평상 위에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로 사용된다.

뒷마당은 그리 넓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된장. 간장 등을 저장하는 장독대나 화단, 우물이 있는 곳이다.

마당은 한옥(韓屋)의 구조에 있어서 바깥 공간이다. 비어 있는 듯한 공간은 여유, 사색의 마음 공간이자, 놀이와 휴식의 공간이기도 하다. 마당이 있어야 마루에 눕거나 앉아서 바깥 자연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감상 공간이 생긴다.

서민들이 사는 초가집의 구조는 부엌이 딸린 방 두 개와 마당으로 구성돼 있는 게 보통이었다. 방은 비좁아 식구 수가 많아지면 한 이불 속에 여러 명이 함께 자야했다. 바깥은 마당이란 넉넉한 공간이 있었다. 외양간과 돼지우리와 닭 집이 있어야 했다. 감나무, 밤나무가 몇 그루 서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맨드라미, 분꽃, 함박꽃을 심을 꽃밭이 있어야 했다. 마당이 넓은 집이라면 우물과 장독대와 화단이 갖춰졌다.

마당이 있어야 대청에서 비가 오고 꽃이 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여름이면 마당에다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을 깔거나 대로 만든 평상을 내놓았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앉아서 삶은 감자나 옥수수를 먹으면서 옛날 얘기를 나누거나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마당은 자연과 인간과의 만남, 바깥과 안과의 조화를 위한 공간이었다. 빈 공간만이 아니라, 마음의 휴식과 실생활과의 연계를 위한 예비 공간이기도 했다.

마당은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달밤이면 달빛이 내려앉고, 새와 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밤이면 풀벌레소리가 자욱한 소리의 마당이 되기도 했다.

비좁은 실내와 옹색한 살림살이를 보완해 주고, 숨통을 틔워주는 공간이었다. 방문을 열면 마당이 내려다보이고, 흙 담에는 호박꽃이나 박꽃이 피어있다. 담 너머로 들판과 산 능선의 곡선이 구비치듯 흘러간다. 마당의 감나무나 밤나무 잎 새의 빛깔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바람의 감촉을 맛본다.

한옥의 마당은 여백이나, 빈 공간만이 아니다. 여유와 휴식의 공간이자, 평화와 보호의 공간이다. 열려 있지만 담 벽의 보호망으로 안전의 공간이 된다.

옛날 한옥에서 살던 때는 마당이 있어서, 마음의 쉼터와 정서의 텃밭을 가졌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집이랄 수 있는 아파트엔 마당이란 개념과 공간이 배제돼 버렸다. 한국인들은 어느새 마당을 잃고 공간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파트의 특징은 마당을 없애고 실내 공간의 최대화를 도모한 주거 공간이다. 마당이 없기에 닫혀 있는 폐쇄공간일 뿐이다. 이웃도 모른 채 지내고, 극도의 개인주의를 추구한 주거 공간이 아파트다. 서로 알지 않으려 하고 간섭하고 방해하지도 않는다. 아파트에 혼자 사는 노인이 죽어도 알 지 못하는 비정한 공간이다. 편리와 개인적인 안일만을 추구한 아파트는 만남과 놀이가 없어지고, 공동체를 위한 공간도 사라졌다. 하루씩을 살아가는 편리한 주거 공간일 뿐 추억, 정서, 자연과의 교감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상생(相生)의 공간이 될 수 없다.

인생은 자신이 마음속에 그려온 하나의 집을 짓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이란 이상, 성취, 성공의 유사어(類似語)일 수 있다. 아무리 호화롭고 크다고 할지라도 마당이 없는 아파트는  안과 밖, 인간과 자연,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을 취할 수 없다. 주거 공간엔 사색의 여백과  자연과 우주를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필요하다.

아파트에 살다 보면 흙이라는 생명체의 본향, 햇빛이라는 생명체의 은총, 비라는 생명체의 어머니를 잊어버린다. 빗소리의 음향을 듣지 못하고 바람의 감촉을 알지 못한다. 별과 달을 보고 느끼지 못한다.

마당이 없는 공간에 살게 된 한국인은 어느새 공간감, 여백의 아름다움, 자연의 정서를 점점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집을 단순히 편리와 휴식의 주거 공간, 언제든지 사고파는 투자 가치로만 인식하게 된 건 서글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서 오래 동안 살았던 집의 추억, 낭만, 분위기로 인한 잊을 수 없는 서정과 상징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고향, 집, 어머니는 동격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한국인이 오래 동안 누렸던 마당의 상실로 인해 분명 잃은 것도 많으리라.

시골에서 마당이 깊은 한옥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안온해진다. 비로소 고향집에 온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