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신청 532-8702-3 서원순 사무국장 . 편집주간 권남희
겨울나무
鄭 木 日(한국문협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겨울나무는 4B연필로 그린 누드 데상화…….
매끈한 속살을 드러내고 몸 전체로, 연륜의 체험과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허장성세나 허식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맞고 있는 모습은 면벽(面壁) 수도하는 성자처럼 초연하고, 표정 속에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겨울나무에선 인고를 견뎌낸 내공과 생존의 중심이 보인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휘어지곤 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고요와 달관의 모습으로 바람결에 일생을 울려내고 있다.
겨울산은 녹색으로 꽉 찬 산이 아니라, 비움이 있어 속살이 훤히 보인다. 나무들도 녹음으로 우거져 있어서 성장한 차림새를 보일 때보다 겉옷을 벗어버린 속옷 차림의 편안함을 보여준다. 나신(裸身)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상하좌우로 뻗은 나뭇가지들은 어느 나무나 기막히게 균형과 조화를 취하고 있다.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도 반대쪽으로 나뭇가지를 더 배치시켜서 균형의 미를 취하고 있다. 나무만이 갖는 본성적인 조화의 미는 오랜 세월동안 얻은 생명률(生命律)이 아닐까.
겨울나무의 표정은 빛남이 아니라, 인고의 침묵을 보인다. 색채와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내면으로부터 고요와 엄숙이 풍겨 나오고 있다. 색(色)을 벗어버리고 근육질의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바람 속에 관절염을 앓는 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곤 하지만, 모든 걸 비워서 담백하고 초연한 성자처럼 서있다.
땅은 얼어붙었으나 나무의 모습은 안쓰럽지 않다, 여유롭게 바람결에 바이올린을 켜는 듯 겨울을 연주해 내고 있다. 겨울나무들은 녹음과 꽃으로 보는 풍성함과는 달리 골체미(骨體美)를 드러낸다. 좌우로 뻗은 가지들의 조화와 간격미가 기막혀서 눈이 삼삼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꽃과 열매로 성장한 모습에선 성숙의 미를 보이지만, 겨울나무의 알몸에선 실체의 근원적인 미를 드러내고 있다.
겨울나무는 사색 중이다. 동한기(冬寒期)의 수도(修道)에 빠져 있다. 동한기엔 아무에게도 말을 나누지도 않을 것이다. 침묵 속에 잠언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겨울엔 나무들의 뿌리가 보이는 듯하고, 하늘로 치켜 오른 가지들의 근육과 힘살이 보인다.
겨울엔 나무들이 바깥의 풍성함을 구가하는 게 아닌, 내면의 진실을 찿고 마음을 연마하는 중이다. 메마른 듯한 밋밋한 가지들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깊은 호흡과 내공을 보게 한다.
시골 마을 입구에 백년 수령(樹齡)쯤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만난다. 가을이면 사방으로 짓붉은 단풍을 뿌려놓아, 누가 선지피를 흘린 듯했다.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짜릿한 아름다움을 보였다. 겨울엔 사방으로 천 갈래 만 갈래의 가지들을 드러내 놓은 그 어울림의 미학이 돋보인다. 어떤 폭풍이나 강설(降雪)에도 기울거나 꺾어지지 않게 상하좌우가 잘 어울려 평행을 맞추는 나무만의 절묘한 비법은 나무가 터득한 삶의 오묘한 깨달음이 아닐까. 바람에 꺾이지 않게, 나뭇가지를 악기 삼고, 바람으로 하여금 나무의 연주를 들려주게 만든다.
겨울나무 가지에는 시련과 인고를 견뎌내서 추위와 바람 속에서 움을 키워낸다. 움 속에는 꿈과 꽃과 나비의 날개짓이 있다. 눈보라와 추위가 있기에 나무는 성장하고 꿈을 키워간다.
겨울 산의 바람소리엔 늑대와 이리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늑대와 이리는 우리나라 산에서 사라져버렸지만, 겨울 산에선 아직도 야성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울려오고 있다.
가혹하다. 바람은 귀와 눈과 가슴을 마구 때리고 후벼 파며 이리떼처럼 덤벼든다. 섬세한 나뭇가지 속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새의 둥지를 볼 때, “아-” 하고 경탄한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 속에 덩그렇게 지어놓은 새집 한 채 ……. 나뭇가지 속에 작은 나뭇가지를 물어와 지어놓은 둥지는 얼마나 따스할까. 겨울 찬바람에 떨어져버릴 것 같은 둥지는 을씨년스럽지만 정겹기만 하다. 새는 나무 위에 집터를 고르는 데도 가장 안정성을 취한 듯 상하좌우 무게의 중심점에, 조화의 한가운데를 택한 모습이다. 집이 나무 전체의 균형에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나무나 새나 자연과의 조화에 타고 난 미의식을 보여준다.
겨울 산의 비어 있는 여유와 사색을 본다. 나무들 속살의 아름다움과 내면을 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새집에 따스한 등불을 하나 켜주고 싶다.
'월간 한국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월간 한국수필 3월호 (0) | 2013.03.04 |
---|---|
월간 한국수필 2013년 2월호 (0) | 2013.02.04 |
월간 한국수필 12월호 (0) | 2012.12.04 |
월간 한국수필 11월호 문학상 공고 (0) | 2012.11.07 |
팔월이면 생각나는 것들 한국수필 8월호 (0) | 201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