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월간 한국수필 6월호 <지난호 합평죄담회 > 안병옥.홍억선. 김영월 참여

권남희 후정 2014. 6. 10. 16:07

특집2 한국수필 이달의 합평 좌담

월간 한국수필에서는 매달 발표된 수필 중에서 개성있거나 문제의식을 던지는 수필을 선정하여 본회에서 추천한 3분과 합평좌담회를 가지고 토의를 거친 다음 발췌 정리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글이 한 편 발표되면 3가지 형태의 의도가 탄생합니다. 작가의 의도, 독자의 의도, 그리고 작품 스스로 갖는 의도입니다. 매호마다 선별기준이 달라지는 것을 감안하시고 다양한 읽기를 통해 타산지석의 묘를 얻기 부탁드립니다. 합평에 선정된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합평작품

1. 김혜숙< 어머니와 재롱잔치>

2. 임병식< 일소 이야기>

3. 성목 <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

합평위원 (홍억선 : 수필세계 편집인 )

김영월 :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안병옥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권남희 편집주간 : 선별한 이유를 근거로 다양한 각도로 원고를 평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사적인 수필쓰기는 여러모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와의 소통, 친화력, 문학인구의 저변확대 등- 그러나 아무리 사적인 내용도 배경에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요인을 안고 있습니다. 접목의 필요성을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김영월: 김혜숙< 어머니와 재롱잔치> 는 백수에 이른 노모가 치매에 시달리고 있는 가정사를 다루었다. 이런 경우는 통상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대부분이지만 화목한 가정인지라 형제자매들이 합심하여 함께 돌보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동요를 합창하며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하는 재롱잔치가 눈물겹게 드러난다. 그러나 ‘장수가 축복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고령화 시대에 건강을 상실한 부모를 오래 모시는 일은 현실적으로 엄청난 가족의 부담(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문제를 부각시켰으면 한다.

임병식<일소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에 소 키우기 경험담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전염병이 아니고 고창증으로 죽은 어미소를 면사무소 직원이 찾아 와 무조건 생매장 시켰지만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소중한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가끔 사육 농가에서 전염병이 돌 때마다 자식 같은 가축을 공권력에 의해 집단 매장하는 경우 보상금과는 별도로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이 언급 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성목<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는 스님의 형부가 백혈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에 이르러 생과 사에 대한 깊은 불교적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너무 어두운 분위기와 무거운 내용이 독자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문학은 철학도 종교도 아니고 미적 추구에 가치를 둔다.

안병옥 :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특히 수필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생생한 산물이다. <일소 이야기>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소재인 소를 통해 동물의 모성 본능과 인간과의 교감을 재미있게 다루었다. 농경사회에서 흔하던 소는 급격히 산업화가 된 우리나라에서 이젠 귀한 소재로 생소하기까지 하다. 현재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나 관습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훗날 특별한 가치가 생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 묵을수록 빛을 발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특히 묘사의 속성인 장황함을 벗어나 단순한 문장 구조만으로도 생생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한 문장력도 탁월하다. 다만 소를 바라보는 작가가 애정 어린 눈길로 일관하다 마지막 부분에 싼값에 고기를 팔아 아쉬웠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은 독자를 당황시킬 수 있고 주제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는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석한 외사촌형부의 죽음을 애잔한 마음으로 토해낸 작가의 애달픔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신식 혼인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만으로도 흑백사진 속의 옛 정경이 그려지고 곳곳에 그로 표현된 형부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떠올리고 있다. 평생 글줄을 잡고 있던 사람답게 내공에서 오는 필력이 느껴지며 시적이고 단아한 표현과 감성이 충만한 문장은 춤추는 듯 리듬이 있다. 하지만 인연과의 만남부터 발병의 과정과 죽음까지의 나열은 정제되지 않은듯해 아쉽고, 곳곳에 드러난 과한 감정의 토로는 독자의 감동을 반감시킬 수 있다. 작가가 감정이 과잉 되면 독자는 마음의 문을 닫고 그저 구경꾼이 될 뿐이다.

홍억선: 이달에는 사람 냄새 물신 풍기는 세 편의 서정수필을 탐독하는 호사를 누렸다. 수필의 효용성은 어쩌면 김혜숙의 글처럼 차가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데 있거나 성목의 글처럼 깊은 사색의 숲에 발길을 머물게 하는데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임병식의 <일소 이야기>처럼 아득한 추억을 곱씹어 보면서 깊은 미각을 우려내는데 있는 것도 같다. <어머니와 재롱잔치>는 이 시대에 부모자식 간의 도리가 어떤지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감동적인 글이다. 다만, 본문 “지금까지도 사랑과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신 동생 부부의 애로와 고마움을 알기에 가족이 상의해서 경정한 일인데 가장 수고하는 올케가 거부하니…….” 이후, “ 어머니는 곧 잊겠지만 내겐 잊히지 않을 선물이다.”에 이르기까지의 단락은 문맥의 통일성과, 정서상 축소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성목의 작품은 근래에 본 글 중에 가장 오래 여운이 남는 사유수필 중에 하나 다. 산문이면서도 유려하게 율격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작가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하였다. 다만 다음의 글을 읽으면서 ‘미문(美文)은 화려하나 본뜻을 훼손한다. 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권남희 편집주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않는 제목잡기, 문단구성, 사색한 흔적 등에 대해서도 다시 짚어주시기 부탁드립니

김: 제목잡기가 무엇보다 작품의 얼굴인 만큼 내용에 대한 호기심도 잘 드러내야 성공할 수 있다. 성목의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 라는 제목은 무거운 주제에 비해 너무 가벼운 느낌이 든다. 수필은 솔직한 자기 고백의 문학인만큼 형부를 ‘그‘ 라고 지칭한 3인칭 보다는 직접적인 형부 호칭이 더 친근감 있게 여겨진다.

문단 구성도 도입부가 불교적 내용으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임병식의 <일소 이야기>는 어미소의 새끼 사랑이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어버이 사랑에 비유해 그런 쪽으로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욱 호감을 줄 수 있다.

안: <어머니의 재롱잔치>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제목이다. 기대대로 첫 단락부터 경쾌하고 화목한 느낌으로 기분 좋게 시작하여 독자를 밝은 기운으로 이끈다. 고령인 노모에게 즐거운 노래와 율동으로 놓아버린 정신줄 잡아주기에 온갖 힘을 쏟는 자식들의 효심이 감동적이다. 최선을 다하는 자식들 모습의 이면에는 훌륭하게 소임을 다한 어머니에 대한 찬사가 녹아있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지나친 부연(특히 올케 얘기)으로 인해 전체 내용이 양분된 느낌이다. 이미 글쓴이가 중심이 된 흐름이므로 이것을 견지하고 끝까지 이끌어져야 안정감이 있다. 따라서 동생부부 얘기는 간단한 언급 외에 과감히 삭제하고 그 부부를 중심으로 한 편을 새로 완성함이 좋을 듯싶다.

어떤 인연과의 이별을 다룬 글인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는 주제와 상반된 느낌의 제목이 다소 의아했다. 잔잔하고 깊이 있는 사색으로 시작한 도입부는 격조가 느껴지고 작가의 배려심이나 고운 심성이 행간에 묻어나 있어 저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작가의 고뇌의 흔적과 석존의 말씀을 혼합하여 삶의 무상함을 전한 서두는 그 깊이가 본문을 압도하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뒤에 이어지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와 그 구성은 가벼우면서도 산만하다. 그리고 외사촌 형부를 꼭 그라는 표현으로 써야 했을까? 이 하나의 대명사로 독자의 감정이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 이 좋은 작품들을 정독하면서 우둔한 눈에 밟히는 점이라면 제목에 대한 트집이다. 우선 김혜숙의 <어머니와 재롱잔치>는 <어머니를 위한 재롱잔치>가 본문의 내용이다. 제목에 ‘공동격 조사 ’와‘를 붙이는 경우는 두 가지 대상의 비교와 대조 또는 관계를 설정할 때이다. 일테면 ’ 아들과 딸‘, 봄과 여름’ 등이다. 결코 고쳐 쓰라는 말이 아니라 어법이 그렇다는 고언이다.

성목의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는 시적 분위기가 전편에 흐른다. 제목도 그러하다. 재삼재사 읽어보아도 제목이 본문을 아우르지 못하고 비껴난 느낌이 든다. 석존의 말씀을 빌려 ‘인간의 목숨은 찰나’라 하였으나 내 손으로 보내는 세속의 인연은 ‘견디기 힘든 비애’라는 제재로 전개되는 글이니, ‘만남의 길목’이 아니라 나고 죽는 ’생멸법‘이 이 글의 핵심어로 보인다.

임병식의 <일소 이야기>는 병렬식 구성의 글로서 풍성한 연륜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글이다. 본문의 화소를 나누어 보면 1재산적 가치가 있는 소, 2우공의 신분으로서 소, 3새끼를 사랑하는 지독지정의 소, 4유년시절의 소 키우기, 5죽은 소 처분에 관한 에피소드로 이어져 있다. 작가는 제목 ‘일소’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한자로‘役牛’를 달아놓았다. ‘役牛’는 ‘부리어 일을 시키기 위한 소’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다양한 화소를 통합하기 위한 제목으로는 좀 더 넓게 잡아 <소 이야기>정도가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 ‘뻔한 글쓰기를 피하라’는 뻔한 말도 있지만 방심하다가 표현의 상투성이나 의식의 상투성을 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재의식 깨우기 등방법론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요?

김: 사적인 이야기에서도 서술 형식으로만 나가다 보면 뻔한 글쓰기나 상투적이 표현이 되기 쉽다. 경험의 사실성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노럭이 필요하다. 3편의 작품이 모두 개인 신상의 이야기에서 맴도는 것을 피하여 특징적인 체험에서 소재를 곰삭혀 잠재의식으로 열어 나갈 필요가 있다.

안: 안개 속 같은 미망, 상념이 서리다, 안도의 한숨을 내몰다, 어머니는 우리의 대지이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상투적인 표현들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사용될 때가 많다. 얼핏 자신의 눈으로 발견해낸 것 같지만 이미 여러 사람을 거쳐 모두에게 익숙해진 표현들이라 개성이 없다. 이런 상투성을 피하려면 퇴고를 통해 낯익은 문장 가려내기를 거듭하여 자신만의 참신한 눈으로 재창조해 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권: 작품감상 총평도 부탁드립니다.

김: 세 작품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를 설정하였다. 김혜숙<어머니와 재롱잔치>는 장수 고령화 시대에 치매 환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이 있게 드러내지 못했다. 임병식 <일소 이야기> 는 수입소에 따른 소값 하락이나 전염병에 따른 사육 농가의 문제점등도 짚어 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성목 <어느 고운 만남의 길목에서> 는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에만 그치지 말고 ‘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간다. 그들과의 아름다운 기억, 그걸 안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는 위로의 메시지가 전해졌으면 한다.

안: 세 편의 수필 모두 단단한 기본과 내공이 느껴지는 수작들이다. 필력 또한 만만치 않아 문장과 단락의 흐름이 탄력을 잃지 않았다. 다만 과한 욕심으로 들어간 부수적인 이야기들로 인해 다소 산만해지고 큰 틀이 흔들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수필은 주관적인 글인 동시에 대중적인 글이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에 몰입되어 중심을 잃으면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자의 공감도 얻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하나의 축을 향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 글 속의 곁가지를 과감히 쳐 내는 것은 어렵지만 좋은 작품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다. 과유불급은 수필에서도 적용된다.

홍: 안개 속같은 미망을 어지러이 헤매다, 문득 우리는 생의 허망감에 싸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 적잖이 당황하고 만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휴지처럼 하찮아 보이고 무엇을 위해 허덕여왔나 새삼 자신을 낮은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는 왜소한 자기 자신과 부딪치게 되고 미쳐 마련 못한 생의 비애를 서늘히 퍼 올리고 만다.

모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이달에는 세 분의 사색 깊은 수작들을 음미하는 복을 누렸다 그럼에도 외람되게 억지 토를 달아본 것은 순전히 합평회의 의도 탓이었다고 말씀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