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발행인에세이 2015년 3월호
화개 장터 십리 벚꽃 길
鄭 木 日수필가(한국문협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임이여. 봄이 오면 한반도 남녘 땅,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 경계를 이루는 화계 장터로 오라.
화개(花開), 말 그대로 꽃이 피는 곳, 화개 장터에서 쌍계사로 이르는 십리 길은 이 땅의 길 가운데 가장 화사로운 길이다. 꽃마차를 타고 봄의 궁궐로 가는 눈부신 봄 길이다.
임이여, 이 길을 걷는다면 그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리라. 봄이 펼쳐놓은 신비의 음계(音階)를 밟으며 꿈꾸듯 거닐면, 길 양편으로 벚꽃나무들이 가지를 길게 뻗쳐 꽃 터널을 만들어 준다.
임이여, 봄이면 화개로 오라. 이곳에 오면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 눈짓으로 밀어를 나누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화개장터 주막에서 잠시 지리산 도토리묵과 산나물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되를 마시고 숨을 돌이킨 후 벚꽃 만발한 십리길 쌍계사로 가자. 하동군 안에서 지리산 산간 부락을 잇는 교통로가 있는 곳이 화개면 탑리, 여기에 화개장터가 있다. 이 곳은 동쪽과 서쪽으로 길이 갈린다.
서쪽으로 난 길은 전라도 땅 구례로 가는 길이고, 동쪽으로 난 길은 쌍계사를 거쳐 하동 땅의 북쪽 끝에 달린 화개면 법왕리와 대성리로 이어진다. 또 쌍계사 뒤의 산줄기를 타고 가면 청암면 묵계리로 가는 길이다.
닷새장인 화개장은 예전부터 숯, 산나물, 약초, 나무 그릇 같은 산중 물산이 은성하게 나오는 장터로 전국에서도 이름이 났다.
작가 감동리는 화개장터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장말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황화물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쪽집게, 골백분 또한 고갯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고기, 자반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山峽) 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로 사철 흘러 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진양조 단가,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달빛과 메밀꽃이라는 서정적 배경이 없고서는 토속성과 감동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는 십리 벚꽃길과 화개장터라는 배경이 없고선 제 맛을 살릴 수 어려웠을 것이다.
임이여 눈물이 나도록 푸른 하늘과 화사한 봄길, 벚꽃 십리 길을 걸어서 쌍계사로 가자. 지리산 정기와 명상을 실어 나르는 화개계곡의 물을 보면서……. 비로소 언 땅이 녹으며 이 땅에 봄이 오는 소리, 침묵 속에 잠겼던 지리산의 장엄한 말이 풀리며 꽃으로 피는 소리, 그것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랑이 움을 틔우는 소리가 아닐까. 불그스레한 벚꽃나무 가지에 꽃망울들이 다투어 피어 새 천지를 만들어 놓았다.
벚꽃처럼 눈부신 꽃도 없을 성 싶다. 일제히 함께 피어나, 꽃무더기를 이루고 온 세상을 환상의 흰 구름으로 덮어버린다. 그 어떤 꽃들이 이렇게 세상을 눈 온 날 아침처럼 하얗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까.
벚꽃나무들은 이미 노령의 티를 보이고 있건만 봄이면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처럼 다시 태어나곤 하니, 생명의 신비와 외경을 느끼게 한다.
지리산록의 물기 도는 신록엔 새 생명에만 풍기는 향기가 난다. 십리 벚꽃 길을 따라 오르면 산등성이에, 푸른 잎을 나부끼며 찻잎들이 솟아오르고 있다. 화개천 계곡 40리 주변은 자설차 자생지로서 1천여 년 전 신라시대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이 퍼졌다고 알려져 있다.
임이여, 그대는 작설차 맛을 아는가. 담백하고 무미인 듯하지만, 그 맛 속에 지리산 달빛과 명상이 가라앉아 있어 임이 부는 피리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임이여 화개 벚꽃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혼담을 나누면 백년해로를 기약한다 해서 ‘혼례길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개울가에 눈을 뜬 버들가지가 봄의 음표(音標)처럼 솟아오르고, 새들도 지리산 음색(音色)으로 노래하는 벚꽃길,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봄길을 걸어오라.
박경리의 대화소설 ‘토지’에 나오는 용이, 길상이, 봉선이도 걸었던 길, 그리고 여러 고승들과 신라의 시인 최치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서산대사, 조식, 이이, 정몽주가 시를 읊었던 이 길을 걸어 봄의 궁궐로 가 보자.
임이여, 십리 벚꽃 길을 걸으며 인생길을 생각한다. 눈부신 벚꽃 잔치도 이내 끝나고 말 것이다. 내 삶의 한 길목에 서 있음을 느낀다. 물소리, 바람소리의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임이여, 절정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벚꽃나무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 봄 길을 걸어 가보자. 기막히게 눈부신 산수화 속으로 손잡고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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