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 (오른쪽부터 이정애수필가. 형유심초 .동생유심초, 전수림수필가)
권남희 수필가
사랑이여! 를 부른 유심초 인터뷰
서현역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재생병원쪽으로 가면 스포츠 센터가 있다. 그곳 헬스클럽 회원인 유심초 (유의형. 유시형) 를 만났다.( 성악가이며 문학 애호가인 김두복 님의 소개)
1981년인가 , ‘사랑이여’의 애절함에 빠져 한동안 애창곡으로 불렀지 않았던가. 평범한 주부로 별일도 없어 무료했던 내게 슬플 사랑의 주인공이나 되는 양 착각하게 만드는 노래‘사랑이여’의 위력은 대단했다. 노래는 심장을 뚫고 지나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스탠드바가 유행이었던 그 때 노래해야할 일이 생기면 ‘사랑이여’만 불렀다. 그런데 더한 것은 그 노래를 몇 년 동안 애창곡으로 삼은 내게 정말 슬픈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후 나는 그 노래가 무서워 부르지 않았다. ‘사랑이여’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가슴에 통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노래에 자기 최면이 있나 생각한 나는 다시 ‘사랑을 할거야’ ‘올 가을엔 결혼할 거야’로 노래를 바꾸었다. 어떻게 됐냐구요? 정말 노래대로 되었지요 . 사랑하고싶은 분 무조건 바꿔!!!
‘사랑이여 ’ 팬입니다 .반갑습니다.인사를 하니 동생 유의형이 바로 반긴다.“ 봐 이렇게 팬이 있다니까. ” ‘사랑이여’ 보다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더 좋아요. 그 노래가 ‘사랑이여’의 완성형이라고들 하던데.
: 문학하는 분이 인터뷰한다니까 너무 고상한 것 같아서 할 말이 안 나온다며 미리 준비해 간 질문지를 들고 다른 쪽 테이블로 가서 한참을 들여다보는 동생 유의형. 약간 곱슬머리에 금목걸이를 했다.
주로 형님 유시형과 대화를 했다. 당시 꽃미남의 미모?가 남아있는 형은 이지적인 외모에 차분한 분위기였고 동생 유의형은 헬스 10년 때문은 아니겠지만 체격도 형보다 크고 몸짱 쪽이었다.
‘사랑이여’ 노래를 부르던 때가 제일 화려했지요. 무명가수였는데 ‘사랑이여’를 통해 유명해졌어요. 슬픈 일은 아버지께서 성공한 것도 못보고 ‘사랑이여 ’ 노래 뜨기 그 1년 전에 돌아가셨던 일이지요. 무명가수 생활을 많이 걱정했어요. 시상식 때 울고 싶었는데 참았지요.
다시 태어나도 가수하시겠어요 ? 왜 늘 뻔한 질문을 할까 미안하기도 하다.
가수를 하고싶은데 좀더 많은 탈렌트를 받고 태어났으면 해요. 외모도, 가창력도 재주를 더 주었으면 열심히 하고싶어요 .
전공은 원래 외국어대학교 국제통상학 말레이시아어 전공였구요. 동생은 한양공대 산업공학과였는데 동아리 활동으로 노래를 하다가 대학 축제무대에 서고 텔레비전 대학생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그런 계기로 .LP판을 내자 그런 제의가 들어와서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던 거지요. 특별히 노래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아마츄어 노래 동아리를 했는데 그 때 같이 했던 친구가 백영규. 물레방아의 이춘근 등인데 동아리에서 히트곡이 많이 나왔어요.
형하고 학교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동아리 모임을 하셨나요 ?
친동생이니까 형을 찾아 가면 항상 동아리에 있고 어깨 너머로 배우니까 형이 제대 할 때쯤 같이 앨범을 낼 수 있었지요.
팬의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중간에 공백기가 10년? 15년 정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가족들이 심하게 반대는 안했는데 왜 전공을 안 살리느냐 이런 시선도 있었고 전공을 살리지 않은 데 대한 후회도 있었지요. 지금은 오히려 인식이 바뀌어서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가수활동을 좋지않게 보았어요. 형은 미국에 가서 15년 정도 사업을 했고 나는 한국에서 사업을하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오히려 요즘은 같은 분야로 매진하면 장인정신으로 보아주잖아요.
SM기획 이수만이 기획사로 성공한 것을 보면, 우리도 처음에 ‘사랑이여’도 제작하고 후배가수 앨범도 제작해주고 했는데 그 일이 결국 기획사 일이었지 않습니까. 원조나 마찬가지인 그 때 차라리 엔터테인먼트로 뿌리를 내렸으면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요.
연예계에 있다보면 억울한 일이나 사기를 당하는 일이 종종 있지 않나요 ?
맞아요. 가수들이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측면이 있어요. 사기 많이 당하지요. 이종용 노래 중에 ‘너’라는 노래 있지요? 사실은 유심초가 오리지널입니다. 원래 이종용과 같이 그 때 작업하면서 형이 제대하면 같이 취입하자! 이렇게 약속하고 먼저 반주를 녹음한 뒤에 형은 귀대를 했지요. 그런데 그 곡에 자기 노래를 넣어서 방송에 먼저 내버렸어요. 선배입장에서 연합판으로 내주겠다고 했는데 방송국에 앨범을 줄 때 우리 노래만 방송에서 틀지 못하도록 칼로 그어놓았어요.
지금 같으면 표절로 문제삼아도 되는데요. 나중에 사과 받으셨나요
전혀. 지금은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로 배신감과 실망으로 노래를 그만 둘 뻔했어요. 나중에 더 많은 히트곡을 내고 그랬으니 다행이지요.
활동 재개를 한 후 연습실은 따로 있나요
연습실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고, 기기가 다 있고 서로 가까이 사니까 번갈아 오가면서 연습을 하고 있어요. 백화점행사. 지자체 콘서트, 기업 행사 등
선진국으로 갈수록 모든 직업이 평등해 보이지 않아요? 남의 떡이 커보이기는 하지만자기 떡도 크게 보고 어느 분야건 크게 보면서 소중하게 여기면 반은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늘 최선을 다하고 다양한 세계에 능력이 모자라면 노력하면 언젠가 이루어진다고 보아요.
딸만 둘인 동생. 1남 1녀를 둔 형에게 또 뻔한 질문을 던진다. 가수 하고싶다는 자녀는 없나요
연예인을 꿈꾸지 않는 십대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자기 꿈을 시간을 갖고 스스로 정리해나가는 거지요. 나의 딸은 대학교 3학년 때 현실을 알고 꿈을 접었어요.
아버지가 어느 정도 큰 힘이 될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도와주지 않았어요. 억지로 만든다고 되지않는 일이니까 ‘너 스스로 히스토리를 쌓아가라.그리고 즐기면서 동아리 활동도 하고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 그 때는 도와 줄 수 있다. ’ 이렇게 말했어요. 얼마나 가수가 힘듭니까. 요즘처럼 가요계의 음반시장이 유통구조의 문제 때문에 위험한 시기인데 , 앨범 제작도 어려운 시기지요. 저작권 보호도 제대로 안도고 가요계가 침체 된 이유가 댄스가수들이 득세하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는 발라드 음악이 설 자리가 없어요. 저작권 협회에서 음원에 대한 저작료를 받고 있지만 제대로 투명하게 오지 않는 어려움까지 있습니다.
우리 때도 가수하겠다고(당시는 트로트) 시골에서 논팔고 소팔아 올라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학교에서 소풍가면 노래하는 아이들은 따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트로트가 대세였지 우리처럼 발라드는 잘 하지 않아서 나중에 우리가 TV에 나오니까 동창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교수님도 아닐거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나이를 먹다보니까 두려웠던 죽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싶어집니다. 늙어가면서 죽어가는 것도 더 담담해지고 바라는 것은 좀 고통없고 쉽게 죽고싶어지는 거죠.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할아버지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는 사실이지요. 할아버지는 옛날에도 할아버지였고 그 전에도 할아버지였을 거라는 인식... 재미있어요. 이제 내가 곧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죽음을 예감하게 됩니다 . 그러다보니까 ‘인생 별 것 아니구나’ 겸손해집니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편안해지는 이유가 경쟁이 없어지고 앞길이 보이니까 그런 것같습니다. 가장 황홀한 죽음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파하면서 그 순간 사라지는 것 그 순간을 기도합니다. 50을 넘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100살 시대 아닌가요? 그때까지 노래하실건가요
노래는 계속 죽을 때까지 하고싶지요. 환갑을 넘으면 자체 라이브 카페를 갖고 싶습니다.
수익성을 신경 안쓰는 우리만의 카페 , 노래하고 차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편안한 카페를 꿈꿉니다.
앞으로 어떤 노래를 만들고싶어요 . 혹시 작사가 박건호씨하고는 일해본 적이 없나요
발라드죠. 가슴에 묻힐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싶어요.
박건호씨는 우리하고 다른 쪽에서 일을 하셨지요 .
가사로 보아서는 우리 노래하고 분위기가 맞을 것 같아요 .
또 한 번 ‘사랑이여’처럼 국민의 가슴을 강타하는 노래를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2007년 3월 27일 오후 4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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