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권남희 수필가의 작가를 찾아서

권남희 후정 2007. 4. 7. 09:07

 

  사진설명 ( 오른쪽부터 깅영웅수필가. 서승연수필가. 서정범 교수. 깅정녀수필가. 권남희수필가.엄옥순수필가 . 2002년 김의배 수필가 사진전시장에서 )     

권남희수필가의  작가가 있는 풍경


세상을 걸으며 성찰하기를 쉬지않는   ‘한국의 쌍소’  주영준 수필

                                  글 권남희


‘천천히 걸어봐요.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낙엽이 뒹굴고있는 광화문 네거리를 걸으며 늦가을의 쓸쓸한 낭만을  만끽해본다.  

세종문화회관을 옆구리에 끼고 도는  모퉁이 카페에서 주영준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인데 예년처럼 춥지가 않아 조금은 어리둥절하다.  

“ 카페가 없어졌지요?”

몇발자욱 떨어진 채 옆에   서있는 줄도 모르고 각자의 휴대폰으로 없어진 카페자리를 쳐다보며  통화를 하다가 선생님과 나는 웃고 말았다. 출판기념회나 수필세미나 행사가 끝나면 으레 뒷풀이로 모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던 찻집은 이제 웰빙 이름을 건  유기농 아이스크림 집으로  바뀌어  젊은 사람들로 붐빈다.  교직생활을 은퇴하신지 세월이  꽤 흘렀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직도 청년같은 단단함이 선생님의  작은 체구에서 풍겨나온다. 이제 삶의 속도를 줄이고 작은 일에서도  풍요로움을 찾아 천천히 즐기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짚어본다.  잰 걸음에 건강하신 이유를 물으니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내장산, 속리산, 미륵산 등 등산을 다녔다고 한다. 그 때 다져진 체력이 지금까지 유지를 시켜주니 걷는 힘의 저력을 선배작가에게서 확인한다.    


 83년 대들보를 한 집안의 가장으로 형상화하여 쓴 수필   ‘대들보’로 등단하여 <대문여는 소리> <나만 서 있는가> 수필집과 <바보새> 수필선집까지 내신 선생님에게서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쌍소와 닮은,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 을 쓴 쌍소가 젊은 시절 교수임용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중등교사를 자원했던 일이나 ‘산책취미’를 가지고 사색하며 글을 썼던 것처럼 선생님도  어지간하면 차를 타지않고  하루에 만보이상 걷는 일을 쉬지않고 지킨다든가,  꾸준하게 책을 읽고 글 쓰는데서 행복을 찾고 영화를 보며 절대 낙서라고 우기지만 십수년 넘게  수채화 그리기를 하고있는 일 등이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번  장애자를 위한 한글지도 자원봉사에 50여년의 믿음 때문에 소화데레사 이름으로 레지오봉사도 하고 있다.

 선생님에게서 과거,  특차로 여자사범학교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자부심 대단했던 청년기를 엿보지 못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세계문학전집을 섭렵했던 영민함을 눈치채지못할만큼 지금 선생님은 초연해보인다. 무슨 일이든지 ‘평범함의 범위’에서 즐긴다든지,  앞줄보다 늘 두번째 줄에 있기를 희망하는 선생님은 어디서든 나서기를 꺼리는 편이다.  <한국수필추천작가회 회장> 을 지내고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위원으로 있지만 후배들이 잘 모를 정도다.     


  나는 병선이 편지만 뜯어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닫힌 마음을 열어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중략- 나는 병선이 편지를 그대로 치워버릴 수가  없어 무작정 답장을 썼다. -중략-

그 편지가 오늘 반송되어 온 것이다. -중략- 10년 세월을 봉하고 있던 병선이 편지는 이제 입을 열었지만 반송되어 온 내 답장은 언제쯤 병선이를 만나 나의 마음을 열어보이게 될 것인가 -- 돌아온 편지 중 -   

 

제자가 방학 중  보낸 편지를  10년 만에 발견하고 마음이 아파  다시 10년 만에  답장을 보낼 만큼 선생님은  여린 성품이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   원칙주의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한데 생활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교육계에  50여넌 넘게 있다보니  늘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분야가 ‘교육의 눈’에 머물러있어 자칫 젊은 사람들에게 맞지않는 고정관념으로 비춰질 수 있다.  스스로 괴팍한 일면도 있다고 인정할만큼  고집을 가지고있기도 하여 손해인 줄 알면서도 한 번 먹은 일을 밀어부칠 때도 있다.

온실같은 교육계를 떠나 한 때 출판사를 열었다. 덜컥 시작을 하고나서 ‘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지만 손해보면서 밀고 갔다.  생애에 오점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일을 사회에  나와 첫경험으로 치른 것이다.     

   재능이 많다고 감지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 일본어도 잘하시고 번역도 하셨는데 왜 쉬고 계시나요 ”

“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젊은 사람들의 감각에 맞지 않지요. 나 또한 젊었을 때 탐독했던 ‘미우라아야꼬’ 가 잇었던 것처럼 이 시대도 젊은 사람들이 탐하는 ‘거리들’이 있지 않겠어요.  아직도 일본 작가들과 교류는 하고 있지만  그럴 뿐이지요 .”

 물러나 관조하는 세계에 있는 선생님의 하루는 교직에 있을 때나 차이가 없다.        

새벽에 일어나 두시간씩 기도하는 일상과   기록하는 노트에 마음을 쏟고 수필을 쓰면서

 행복을 느끼니 우울증을 앓을 틈이 없어보인다.

은퇴자에게 권리처럼 달라붙는 ‘미식가’ 연하는  취미가 선생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 대부분 자기만의 요리취향을 찾아 여행을 하거나 단골 음식점이 있는데 선생님은 그렇지않으니까 오히려   특별하게 보이세요”

솔직히 미식가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렇게 된 것같아요. 아버지가 식도락가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모습이 웬지 싫어서 의식적으로 음식에 대해 외면했던 게 굳어져서  지금도 먹는 취향은 아니라고 봐야지요.”

식도락보다 학구열에 대한  의지가   선생님의 수필 곳곳에 나타난다.        

선생님의 수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에는 독서에 빠져 다른 일에 지장을 가져올 정도의 사춘기를 지나 직장을 다니면서 주부일까지 해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독서를 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글은 등단을 결심한 동기라고 할만하다.

어느날 우연히 신문에 난 문화센터 광고를 보고 찾아 간 곳이 중앙일보의 서정범교수 수필교실이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동화와 수필 등을  많이 써두었는데 그 작품들을  밑거름 삼아 선생님은 성찰에 가까운  글들을 써냈다. 그 때 쓴 글들이 지금 쓰는 글보다 더 애착이 간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초심자의  공력이었지않을까.   선생님이 희망하는 새 수필집 역시 생활에서 뽑아내는   아름다움과 마음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글이다.  한국의 쌍소 선생님에게   지치지않는 작가적 정신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