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왼쪽부터 김진돈수필가(한의사) . 황혜경수필가. 박수주수필가산귀래별서 운영 .
조경희 회장님 .권s남희 수필가
마음의 스승
- 故 조경희 회장님을 기억하며 -
권남희( 수필가 )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는 다른 작가들처럼 스승을 정하지 못했다. 또 기라성같은 대선배들을 줄줄이 세울 수 있는 J , D, K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어서 학교 선배와 교류도 없다. 특히 이십 몇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수필 문학강좌가 부흥을 이룬 시기도 아니어서 개인 스승 또한 얻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자연히 여성이라 대하기 부담스럽지않고 수필가협회 회장으로 계시는 조경희 회장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제 조경희 회장님과 나에 대한 많지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본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든지 씩씩하게 대처를 하신 편이다. 댁으로 전화를 드리면 언제나 10대 소년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전화 목소리에는 ‘ 무엇이든 부탁만해 들어줄 테니까’ 그런 느낌이 묻어났다. 대인관계나 일에서나 막힘이 없는 분이다. 일단 션생님을 대하면 큰 나무 그늘에 앉아있는 편안함이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친근하게 대해주어 가끔은 큰 어머니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의 편견을 깨버리는 일의 하나가 살림에 대해서다. 이 부분은 전숙희선생님의 수필집에도 나온다. 입맛을 잃은 여름날 선생님 댁에 들러 선생님이 만든 맛갈스런 밑반찬으로
여성문학인회 간사를 할 때 김후란 문학의 집 이사장님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천안으로 이사를 간 김소엽 선생님 댁 집들이를 갔다. 그 때
살림에는 문외한이라 짐작하고 있던 내 생각을 조회장님이 살림살이에 관심을 보이시면서 해박한 살림 정보를 풀어놓으셨다.
‘아직도 바깥 활동이 많으신데 집안 일을 어디까지 하세요“
물었더니 아직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혼자 다 해내신다고 해서 속으로 꽤 놀라기도 했다.
조경희 선생님과 처음 자리를 한 때는 내가 월간문학에 막 등단을 하고 나서였다.
월간문학 수필에 한 번 가작으로 뽑혔던 나는 1년 후 다시 응모를 하여 당선을 한 상태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30 초반의 신인이었던 나는 선배님들이 있는 자리가 도무지 어렵기만 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오학영 선생님이 만들어주어서 동숭동 어디에선가 식사 대접을 했는데 무슨 말씀인가 굵고 짧게 조언을 주신 것같은데 얼른 그 자릴 모면하고싶은 두려움만 있어 얼떨떨했을 뿐 기억이 없다. 그 후 간간이 선생님을 공식 행사에서 뵙기만 했을 뿐 개인적으로 잘해드리지도 못한 채 십수년이 흘러가버렸다.
그래도 선생님은 틈틈이 마주칠 때마다 그 좋은 기억력으로 내 신상에 대한 일갈을 던지시곤 했다.
‘ 요즘 세상 보기드믄 여인이야 . ’그대는 한결같아‘
’ 말하지 않는 듯 , 바라보지 않는듯 하면서 놓치지않고 에센스적인 내용만 표현하는 그런 점이 선생님의 매력이다. 선생님의 수필 또한 성격처럼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핵심을 찌르는 솜씨로 일관한다. 오래된 글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가 문장력에 있다. 가끔 선생님의 작품으로 수필 수업을 하면서 몇 십년 전에 쓴 글인데도 문체나 인식의 범위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감탄을 한다.
유연한 사고력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다.
어떤 분은 선생님을 자신의 수양 어머니를 삼고 깍듯이 대접하기도 하지만 천성이 워낙 무심한 축이고 붙임성도 좋지않은 나는 드러내놓고 선생님을 모시지 못한 편이었다 . 나의 두번째 수필집 출판기념회를 세종문회 회관에서 할 때 한말씀 부탁드리면서 모셨는데 내 글을 빠짐없이 읽어 본후 평을 해주셔서 선생님의 다른 면모를 느끼게 해주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나는 ‘송파수필작가회’ 첫 세미나와 연말 출판 기념회 자리를 미련하여 모셨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선뜻 응해주셨다.
언젠가 선생님을 모시러 아침 일찍 정릉댁으로 갔다.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은 잘 정리가 된 편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책이 쌓여 있었다.
거실에는 그림과 도자기 등이 예사롭지 않아 보여 모두 보물급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님의 부군 사랑은 널리 정평이 나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군을 출근 할 때나 외출할 때 동반하는 모습에서나 혼자 나오셨을 때는 부군의 식사를 반드시 챙겨서 들고가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랑과 믿음으로 다져진 사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군의 시계줄이 끊어졌는데 시계를 차고 싶어하신다고 안타까워해서 시계를 수리해서 갖다 드리기도 했다 . 폐암 투병중임에도 정신력으로 버티시며 내게 한국수필문학상을 챙겨주시더니 부군을 먼저 보내시고 끝내 돌아가셨다.
강화에 선생님의 수필문학관이 마련되었는데 더 많은 콘텐츠와 행사가 생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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