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가의 작가를 찾아서 -문파문학 봄호
2007년 2월 인사동 툇마루에서
뒷짐 진 채 헛기침으로 세상에 몸을 던진 신경림 시인
‘혁명가 신경림’ 두보 신경림‘ ’농민문학가‘ ’ 문학과 현실이 처음으로 하나의 육체를 만들었다‘ 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신경림 시인에게 인터뷰 요청 전화를 드렸다. 시인은 아주 간단하게 ‘할 말도 없고 의미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선생님의 선문답 속에는 이미 신경림 시인에 대한 자료를 모두 찾아보고 알 것 다 아는 마당에 진부하게 반복할 것 없지 않느냐는 의미와 너무 똑같은 형태의 인터뷰 요청 앞에 앵무새처럼 응하고 싶지 않다는 일갈성도 담겨있다. 부담없이 차 한 잔 마시면서 사진만 찍으면 된다고 했지만 전화를 끊고 곰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가탐구의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읽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하나 ? 고민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솔직히 시인에 대한 신상이 궁금하거나 그의 시세계에 대해 알고 싶을 때는 인터넷 검색에 ‘신경림시인’만 치면 수백 개 이상의 검색 가능한 자료가 뜬다. 무한한 바다에 던져진 듯 어떤 절망감과 아연함이 밀려든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신경림 시인의 팔짱을 끼고 인사동을 거닐다가 툇마루에 들어가 술을 마시는 수 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지 않은가. .
대단위의 고층아파트가 집의 개념을 통일시키고 인터넷 공간이 백과사전을 삼켜버려도 문학인은 애정어린 시선과 교감을 끊임없이 나누며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신경림 시인은 민족작가회의 회장을 역임했기에 따라드린 맥주 한 잔을 비우기도 전에 2007년 새해 ‘민족작가’명칭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일을 여쭈었다. ‘독재하고 싸울 때는 민족이라는 이름이 필요했지만 민주화가 된 세상이고, 앞으로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을 막는 등 세계화에 방해가 되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고 잘라 말씀하신다. . 덧붙여서 ’민족‘이 잘못 쓰이는 경우를 곳곳에서 발견하는데 남북 공조라고 쓰이지만 잘못해서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청산유수 언변이 아닌데도 모든 말씀이 명쾌하고 솔직하게 핵심만 짚어주시니 충만함이 밀려들며 시인의 가식 없음에 편안함을 갖고 만다. 그러한 바탕은 역시 한 때 민요를 취재하기 위해 남한강 일대와 충청도 , 경상복도 등 전국 각지를 다니며 민중의 삶 속에서 터득한 지혜라고 유추해본다. 시 ‘목계장터’ 에는 그의 삶을 보는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고은, 송기원,조태일, 구중서와 함께 선생님이 중심이 되었던 ‘민요연구회’와 시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요도 중요하여 한동안은 민요적인 정서를 도입했는데 ( 시집 ‘달넘세’) 나중에는 한계를 느껴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 유종호 교수가 ‘다른 시를 추문으로 만들었다’ 고 할 정도로 빛나는 감각을 가졌다고 했는데 1990년 이후 시인으로서 어떤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고 들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며 시인으로서의 사회성을 돌아보고 ,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를 쓰는 일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 대답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을 향한 탐구측면이 크기에 90년 대 이후부터 ‘나’에게 더 치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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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는데 그 까닭을 어렸을 적의 식습관에서 찾는다. 장손이었던 시인은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음식을 섭생했고 그런 이유로 지금껏 감기 몸살 한 번 걸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으니 이 또한 복이라 한다.
몇 년 전 이혼하신 걸로 아는데 요즘 즐거우시냐고 지연희시인( 발행인)이 운을 떼자 ‘ 혼자 사니까 편하고 즐겁다’며 진심임을 강조하신다. 첫 시집 ‘ 농무’ (1973년)가 나오기 전 부인을 위암으로 잃고 몇 년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 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헤어지는 아픔에 담담하게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았을까 . 그의 시 ‘더딘 느티나무’ 는 자신만 남아 대면하고 있는 고독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지연희 시인이 짖궂게 ‘연애사건도 있을 법한데 어떤 여성을 좋아하세요’ 묻자 ‘활달하고 술 잘 먹고 푼수같은 타잎’이라며 젊었을 때(50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한쪽의 사랑으로 끝났다고 얼버무려 동석한 두 여성으로부터 의심을 사기도 했다. 시인도 ‘이건 아니잖아 ’를 감지했는지 ‘째째했나?’ 하며 웃으신다 .
아무래도 선생님을 서울로 불러올린 김관식시인과 홍은동 1번지 단칸방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 같아 살짝 여쭈었더니 ‘김관식 시인을 만남으로 계기가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형태로 또 서울에서 활동했을 거라고 한다. 문학적 끌림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문학사, 휘문출판사, 동화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맡기도 한 시인은 첫 시집 이후 ’새재‘ ’남한강‘ ’우리들의 북‘등 많은 시집을 내셨고 평론집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창비‘ ’ 역사와 현실에 대응하는 시-오늘의 책‘ 을 쓰기도 했다. 또한 만해문학상, 한국 문학작가상 수상 등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글쓰기에 있어 언제나 정통적인 무언가를 정립하기를 고집하는 지연희 시인은 대학원에서 신경림 선생님께 강의를 들을 때 감명 깊었던 점을 잊지않고 되살린다. 그 때 시인은 시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며 일대일의 싸움이고 독자층이 넓은 시는 세월이 지나면 끝이 난다. 한 사람의 완전한 독자기 있으면 될 만큼 시는 집중적으로 깊어야 한다. 따라서 시는 꺼진 불의 불씨를 살리는 일으켜 세워야한다. 이런 점을 상기한 지연희 시인은 사람들에게 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다시 시를 쓰려는 젊은이들에게 답을 주기를 청한다.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신경림 .1982, 마당 ) 에 모든 답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신다.
“ 시는 삶의 힘이고 활력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시에는 이론이 필요가 없습니다. 시는 자기도 알고 남도 아는 시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이 독자에게 외면당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의미가 명확해야만 좋은 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뜻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만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남이 할 수 있는 상투적인 소리를 쓰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지요“
현재 동국대에 세워진 시비에 만해 한용운 . 서정주 다음으로 현존하는 신경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있다. 그러한 노력에 비해 우리의 외국문학을 향한 짝사랑은 여전하여 현재 불고 있는 한류바람에 문학은 왜 소외되는가 불만을 비쳤다. 모든 것을 멀리보고 담백하게 진맥해주는 시인은 , 한류바람이 문학에 불지않는다고 우리 문학이 외국 문학에 뒤처지는 것은 아니고 다만 문학은 화려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문화예술의 바탕이 되어주고 핵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과실만 따먹는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한다.
신경림 시인은, 한동안 정부로부터 요시찰 인물이었고 옥살이도 하여 어려웠다. 그 때
故 황명 시인 (한국문인협회 前 이사장)의 도움을 여러모로 받았다고 회상한다. 황명 시인 역시 교사로 있을 때라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는데 통이 크고 어느 쪽이든 아우르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은 교류가 있었다 해도 민족작가회의와 한국문인협회의 관계에 있어, 섭섭하게 남아있는 점을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1975년 당시 한국문인협회에 시국관련 작가들의 구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부탁했는데 해주지 않아 시인은 문인협회를 탈퇴를 하고 만다.
선생님에게 아직도 역마성이 살아있을까 하여 슬쩍 아직도 장터를 순례하시느냐고 했다. 선생님은 그쪽은 전혀 아니라는 반응과 함께 이제는 외국여행을 많이 한다고 하며 삶의 순환성을 풀어놓는다. 1992년까지 출국 정지 신세였다가 김영삼 정부 때 여권을 발급받아 처음 외국을 나가기 시작했는데 봇물이 터졌는지 보통 일년에 5회 이상 안 가본 나라가 없이 다니신다. 북한까지 다녀왔으니 그동안 묶어 놓았던 것을 한꺼번에 풀어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의 일생에서 해야 할 일은 언젠가 하게 되어있는 것 같다고, 불교적인 의미까지 붙인다.
시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주량 맥주 다섯 병을 다 마셨을 즈음 옆자리에서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남자가 인사를 했다. 예전에 ‘농무’를 잘 읽었고 그동안 멀리서 가까이서 가끔 뵈었노라며 자신이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전공을 살려 시인이 되었을거라고 한다. 현역 정치가는 술값대신 김창업의 시 한 수를 낭송하고 자리를 떴다.
툇마루 식당의 역사와 같이 한다는 시인에게 여주인은 동태찜을 서비스 안주로 내었다.
문득 인사동 아니 서울은 시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하며 아무런 두려움없이 걷는 시인에게서 문학적 감수성으로 500년 조선을 이어갔던 면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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