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조병무 평론가 를 찾아서 2007년 한국수필 1.2호(권남희 )

권남희 후정 2007. 3. 17. 20:20
 

 

권남희수필가의 작가를 찾아서

영원한 문학청년 조병무 평론가


추위가 한풀 꺾인 1월 중순의 오후 바쁜 시간을 쪼개 한국수필사무실에 오신  선생님의 모습은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외모나 성품 모두 유쾌 상쾌하신 선생님과의 시간을  정리해본다. 

   

장소 :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실

일시 : 2007년 1월 16일 화요일  오후 4:00

 이철호 (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과 조병무 문학평론가를 모시고

대담진행 :  이숙 사무처장 /정리 권남희


:  개인적으로는 형님이면서 공식석상에서는 문단선배이신 조병무 평론가이며 시인을 모시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 역시 故  오학영 희곡 작가와는 졸업앨범에도 같이 실린 동기이며 조상기와도 같은 하숙방에서 4년을 지냈지요. 모두 같은 문학적 그룹이었다고 생각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요즘 ‘감기 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돌만큼  감기가 유행입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늘 미소년같아서 건강 비결과  선생님의 좌우명을 알고 싶은데요.

: 마음의 즐거움을 지녀야지지요. 생활하는데 늘 ‘즐겁게 살자’ 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해결점을 찾아내고 그렇지 못하다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70년경에 김동리 선생님에게 세배를 갔을 때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는 문단의 대선배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일이 하나의 미풍양속이었지 않습니까. 그 무렵 김동리 선생님은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붓글씨를 한편을 써 주셨습니다. ‘心外無法’이라는 글씨로 마음의 중요성을 알려 주시는 이 네 자를 일생 동안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심정과 생각을 그렇게 잡아 주시고, 그 후에 시를 쓸 때나 모든 생활의 지침이 바로 이 곳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동국대학 시절 ‘동국시집’이 나올 때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지만 중심의 하나였고  형님 작품은 항상 동국 신문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명했지요? 제가 술을 먹지 못하는데다가 형님이 말씀이 없고 내성적이어서 그 때 가까이 하지 못했지만 형님의 문학 활동은 그 때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지 않았나 합니다.

조 : 저는 시골에서 자라서 ‘문학을 하려면 동국대를 가라’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입학을 했지요. 처음에는 시를 쓰면서 미당 서정주 선생님께 보여드리기도 했어요. 저는 이상(김해경)이라는 시인을 좋아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읽어왔기에 대학 1학년 때, ‘이상의 문학적 진단’ 이라는 평을 80매 썼는데 학보사 송혁 시인이 보더니 정말 이걸 썼느냐고 놀라면서 3-4회 분재하겠다고 했습니다. 4-5회 정도 연재했을 때 조연현 선생님이 읽고 어느 날  날 만나자고 했지요. 그 때 하시는 말씀이 시를 할 것인가. 평론을 할 것인가 물으시면서 평론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결정적으로 그 이후 문학평론을 하게 되었지요

이 : 선생님 말씀을 들을수록 학회장을 맡고 4.19를 겪으며 뛰어다니던 제 학창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그 때 감옥도 가고 종로 경찰서도 드나들었습니다. 조연현선생님이 주임교수였는데 하루는 연건동으로 오라고 해서 갔어요. 교수들이 어용교수로 몰려서 추풍낙엽 신세였는데 ‘너에게 달려있다’ 고 부탁을 하는 바람에 깡패들과 부딪히고 동맥이 끊어지는 일을 겪기도 했지요. 다행히 국문과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 조연현씨의 글 ‘눈물의 손수건’ 에 제 이야기가 부분적으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때도 후배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지요.  과거의 기라성감은 움직임을 잃어버린 현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조 : 문학은 정치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순수한 문학을 위한 문학인이 중심을 이루어 결집체가 돼 주어야 하지요. 이원적 논리나 장악논리의 문단 운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0년대. 40년대 특히 해방 전후에 좌. 우익 논리가 팽배했습니다. 지금 다시 정치적 성향의 논리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고 문인이나 문학 단체의 지원관계도 편향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문학은 문학 작품과 문학인을 위한 궤도에 진입 시켜야 합니다.   

이: 어떤 단체나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정치적인 배려도 받는다고 봅니다. 선후배 위계질서도 약화되고 노후대책이 없는 문단은 개선돼야 합니다 . 미술가나 음악가는 정부 차원에서 배려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연말에 대작을 사주고 지방자치제에 따라 각 공공기관이나 공원에 조각품을 설치하는 이런 일은 막후교섭이 작용합니다. 문단 경력 35년 이상 된 사람의 배려가 절실한 시기입니다. 통계를 내고 안건을 내어 정부측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문단의    임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조: 예술계의 복지제도는 형성되어야 합니다. 위계질서도 없어진 채 문단생활 4-5년이 되어도 선배를 모르는 일이 당연하고 편향된 단체에 몰리는 그런  문화정책은 공정성이 없다고 봐야지요. 물론 집행부에서 합당성을 내세우지만  예를 들어 지원기관에서 주는 여러 지원비의 심사를 이름을 가림으로 공정성을 유지한다고 보는 모양입니다만 예술 작품을 작품과 작가를 떼어서 평가가 됩니까. 일생을 예술 작품에 살아온 과정도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언젠가 말했습니다만 복권이 아니잖습니까.   

이 : 선생님을 뵈면 항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주량이 상당하다는 게 사실인지요.

조 : 옛날에는 대단했지요. 요즈음은 소주 한 병 정도입니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가급적 일주일에 일회 정도로 줄이려고 하지요. 나의 건강은 말씀한 바와 같이 마음의 가짐이 중요하고, 매일 새벽 5시 반이면 일어나서 2시간 정도를 걷고 30여분 정도의 기공운동을 30여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문단 후배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조 : 요즘 문학을 지망하는 분들은 문학을 다른 이유의 목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좋은 작품에 대한 열정과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문학을 한다’는 행위 자체를 인정받으려는 태도를 피해야 하지요. 문학이 느슨해졌다는 이야기와 문인 배출방식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이: 그런 점에서 동감하는 부분은 문단등록 절차도 문제가 됩니다. 1회 추천으로 협회에 가입시키거나 계간지를 내고 바로 신인을 배출시키는 부분은 재고를 해야겠지요. 저희는 등단을 하고 3년이 지나도 가입을 시키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두고 있습니다.

조 : 최근에 어떤 단체에 문학 강연을 갔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강연료를 받았어요.  예외적인 일인가 물었더니 사실 행사를 주관하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가수 한 사람 초빙할 때 몇백만원을 주는데, 주최 측에서 문학 강연료도 배려를 하도록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많은 문학지가 작품의 원고료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문학잡지를 운영하지 말아야지요.  신인 배출도부끄럽지 않게 해야하지않습니까.   

이 : 선생님은 시로 문학을 시작했지만 평론을 하시고 수필평론을 많이 맡아주셨습니다.  특별히 수필에 애정을 가지신 이유라도   

조 : 실제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와 가까운 게 수필입니다. 자기의 이상적 정직성을 내세울 수 있는 게 수필이지요. 나 외에 다른 세계를 다루는 장르가 소설이라면 나와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게 수필입니다. 문학도 과거에는 시. 소설, 수필 등 장르 구분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장르가 없어졌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만 유독 장르에 집착을 하는 편이지요. 나는 시 평론 수필 고루 합니다. 장르를 초월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장르를 생각하지 않는 작가가 되어야지요. 

이숙 : 한국에서도 노벨상 수상후보가 거론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 최소한도 우리나라에서라도 작품으로 인정이 되고 “그 분이면 당연하지”라는 인식의 공감대를 인정하는 작가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특정인물을 문학 이외의 문제를 내 세워 어필시켜서 최종후보니 뭐니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노벨상 심사의 최종 후보에 오른 듯 거론되는 보도도 문제가 있고, 만약에 로비에 의해 수상한다면 노벨상도 그렇고 그런 상이지요,  

이철호 :  오늘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늘 (사)한국수필을 사랑해주시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