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월간 한국수필 7월호

권남희 후정 2009. 7. 24. 15:19

 

 

한국수필 6월호 월평

수필은 인생이란 화두로 그려가는 도량道場

金 鎭 植

수필은 인생이라는 화두로 그려가고, 그 여백에서 자적하는 것일까. 한국수필 6월호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시원하고 깊은 맛이 옷자락을 잡고 여백의 한가함이 쉬어가게 한다. 잘 익은 인생의 맛 때문이다. 절이 삭지 않은 풋내기의 재주로는 수필의 깊은 맛에 이르기가 어렵고, 쉼터의 운치와 맑은 바람으로 흐뭇할 수 있겠는가.

깊은 맛의 소택沼澤은 연륜이 쌓여야 하고 쉼터의 운치는 경지가 따라야 한다. 이런 소택과 쉼터를 발견했다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곰삭아서 맛이 깊고, 걸러서 청신하다면 인생이라는 화두가 따로 있겠는가. 속기俗氣를 씻는 맑음과 여유를 예서 느꼈다면 구색의 글이라고 밀쳐둔 채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발행인칼럼과 자란만통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길라잡이나 병풍도 제자리에서 항상 독야청청으로 서 있는 것을 덕목으로 고정할 필요가 없을 성싶다.

정목일의「독서와 차는 독서의 유용성을 개진한 시론적試論的 수필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 앞에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한계의 수용(겸허)으로 지혜의 길을 찾고 있는데, 독서와 차 한 잔의 여유가 이를 해결해 주는데 책을 통해서다. 시공을 넘어선 스승과 만나 교감하고 지혜를 체득한다.

바쁜 일상 속에 차 한 잔의 독서는 삶의 여유와 지혜로 채워준다. 생존경쟁과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을 띄우며, 우리는 정체성을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책이 있기에 주변에 벗이 없어도 견뎌낼 수 있고, 외로움을 지혜와 깨달음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발행인 칼럼은 그 책의 길라잡이 구실을 한다. 이 글은 독서라는 수단을 통하여 삶의 미혹을 씻어가며 차 한 잔의 여유로 스승(저자)과 교감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고요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고, 최상의 행복과 지혜를 누리는 선정의 체험을 들려주는 설법처럼 생각된다. 수필의 도량道場에서 보여주고 있는 차 한 잔의 여백과 독서의 힘으로 빚어낸 것일까. 수필적 구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

김열규의 「밤의 고도에 갇혀서는 낙향한 선비의 자적自適을 소묘素描한 수필이다. 바다와 섬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동행의 인정이 있고 솔밭과 그 향기가 있고 새들의 발자국과 울음과 날갯짓과 노을이 어울려 고도孤島의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그것을 만끽하고 있다. 소박하지만 넉넉하고, 갇힌 것 같지만 자유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있는 그대로 자연이 되어 교감하고 느낀다.

시회詩會가 끝났을 때, 다들 바위베개하고 자갈요 위에 누웠다. 이미 해면은 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직, 은빛 일색! 온 바다가 달이었다. 그 은빛 둘러쓰고 우리는 바다가 되고 달이 되었다. 달이 거의거의 중천에 다다른 녘에 우리들 달나라에서 내린 신선 아닌 ‘해선海仙’들은 일어섰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은유의 수사修辭가 시정詩情을 물씬 풍긴다. ‘바다가 달’이고, 동행의 네사람이 해선이 아닌가. 꾸밈없는 문체에 정이 가고 ‘마생이’처럼 귀에 선 사투리(?)가 구수하고 자연과의 교감이 속기俗氣를 씻어내고 있다. 낙향의 여유 있는 삶이 흐뭇함을 안긴다. 구성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은 분방한 시적 수필이다.

유병근의「기차여행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지나가는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며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세상이 이런 것, 인생도 이런 것 하고 나그네의 눈으로 세태와 인심의 변화를 비춰보고 나름대로 해답에 이른 것이다. 기차가 서는 도시와 서지 않은 도시의 차별이나 인생사의 명암이 다르지 않다. 기차의 속도와 역은 삶의 단락과 정서의 현장이다.

가는 목적지를 고정시키면 보고 듣는 폭이 좁다. 도중에 보고 듣는 것은 모두 허드레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출발하는 그 시간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다. 산다는 것은 길고 짧은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생활 따로 여행 따로, 이렇게 고정시킨다면 인생은 얼마나 틀에 박힌 답답한 공식이겠는가.

고정된 목적지가 인생의 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가 아닌 간이역이 오히려 질펀한 삶과 이어져 있다. 정차하는 완행열차는 순대국밥과 막걸리사발로 부대끼는 삶을 축일 수 있는 장터와 통한다. 빠른 속도의 기차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여간 어긋나지 않지만, 그 속에 있는 인생의 묘미가 있고 시장기를 느끼고 있다. 문명의 효용성을 이용하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문명과 동떨어진 온갖 채색의 삶의 애환이 새겨진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과 세태가 맥을 함께 하며 상징과 대비가 무리가 없고. 구성과 문장이 치밀하고 이미지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정인조의「창밖의 고독은 마음에 둔 여인에게 구애의 전화를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충족되지 않은 내면을 고독의 명암으로 비춰보고 있다. 소외된 것 같아 괴로워 술을 청하고 안정제를 찾고 있다. 그러면서 고독을 관리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고독은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 고독과는 거리가 있다. 용기 있는 고백으로 긴장감을 제고시키지만 그리움이 점점 탈색하여 안이한 모습을 보이고 별로 개연성이 희박한 내용을 끌어들여 고독을 늘어놓고 있는 점은 변명으로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 아쉽다. 고독이라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삶의 불꽃이고, 그 불꽃의 연소는 스스로의 지향으로 결정된다.

고독해··· 그래서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 창 넓은 창가에 앉아 호프 한 컵 앞에 놓고 신나게 떠들고 싶다. 심금을 터놓을 짝이 늘 아쉽다. 외로움이 밉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고독한 시간은 행복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아주 오랜만에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자주 찾아오기도 하는 고독감, 이 고독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독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터득하는 것이 글로서도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언행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 문장으로서도 어긋남을 피할 수 없고 인간적으로도 미숙한 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주제의 흐름에 군더더기가 끼어들지 않게 해야 하고, 구성에 있어서도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버려야 한다. 이글에서 순자 이야기는 주제의 흐름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임병문의「가죽 이름표의 친구는 어릴 때의 우정과 천형天刑의 수인이 된 친구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아프게 그리고 있다. 4학년 때의 단짝인 C는 비닐이름표를 달았던 그때 소망하던 가죽이름표를 공짜로 주었고 방과 후엔 시장통을 쏘다녔던 동무였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러 그를 찾았으나 ‘만날 처지가 아니다’라는 의절의 말 한마디를 가슴에 담고 왔을 뿐이다. 그가 한센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몇 년 뒤 스스로 세상을 등졌음을 들었다.

친구이기에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고 큰소리로 C를 불렀다. 한참만에야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왔고, 더부룩한 머리의 한 남자가 불도 켜지 않은 채 가게로 나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는 얼굴에 커다란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혹시 C가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 반갑다는 말도 앉으라는 말도, 악수를 청해도 손마저 내밀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내가 너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니 이해하라”는 처연한 음성을 남긴 채 집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비극적인 줄거리의 소재가 긴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고, 어릴 때의 C읍의 시장통에 늘어선 가게의 이름도 정겨움을 안긴다. 문장의 구성이나 흐름에도 무난한 수필이다.

수필은 역시 인생을 담고 닦는 그릇이며 도량이다, 온갖 채색과 정념을 칠할 수 있고, 사유의 우물을 파고 축일 수 있으며, 세속의 흐림과 때를 씻으며 마침내 이르는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자연에 쉼터를 마련하고, 보이고 들리는 것들과 교감하며 거닐음의 흐뭇함에 들 수 있다. 이처럼 수필은 인생을 화두로 삼아 둥근 것도 모난 것도 긴 것도 짧은 것도 제몫으로 함께 어울리는 그릇임을 새겨본다.

 

박경리 소설가 1주기 전시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강남 현대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