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겨울호 문파문학 황금찬 시인
때묻지 않은 영혼의 눈을 가진 황금찬 시인을 찾아서
시인의 찻잔이 따로 있다는 혜화동 로터리 우체국 뒤 카페는 작고 아늑하여 낭만이 절로 흘렀다. 선생님에게 시를 배울 때 삼십대 초반이었던 나는 오십대가 되었고 감회에 젖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 멋지다는 첫인상에서 조금치도 변함이 없는 황금찬 시인을 모시고 가을의 마지막 날을 보았다. 가난했던 한 소년이 청초호수와 영랑호수 두 개의 전설 속에서 시심을 길러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 태어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다.
2007년 11월 29일 오후 두시
혜화동 로터리 엘빈 카페
대담 : 지연희 시인.수필가 (문파문학 발행인)
사진, 글 정리 : 권남희 수필가(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 선생님께 늘 감사드려요. 저희 행사 때마다 와주시니 큰 힘이 되거든요. 12월 8일 수원 행사도 알고 계시지요”
지연희 문파문학 발행인 (수필가. 시인)이 말을 꺼낸다.
“선생님을 뵐 때마다 멋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쁜 마음으로 한 말씀 드리자 “멋있는 사람이 멋도 보는 거지요?. 옛날 조병화 시인이 그랬어요. 당신은 보기만 해도 시인이요 . 또 사진작가 한 분이 있는데 그분도 ‘ 이 분은 말 한마디만 들어도 시인인 줄 안다고 했어요.” 응대하시는 재치까지 시인이다. 선생님의 이야기 솜씨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은 이력과 일제치하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그 뿌리라고 짐작한다.
선생님에 대한 시비는 전국에 많이 세워져 있다. 그중 최근 건립된, 북한강 문학비 (북한강이 보이는 남양주 야외 예술 공연장에 세워짐) 이야기를 살짝 물었다. 왜냐하면 다른 곳보다 북한강은 선생님에게 의미가 큰 곳인데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후 1년 동안 기거하면서 시심을 키운 곳이라 들었다. 선생님은 바로 일본사람들의 시인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 선생이었던 이사가와다고꾸 (탁로) 는 47살에 죽었는데 바다와 술을 사랑하여 시가 모두 바다와 술에 대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공들이 돈을 모아서 시비를 세워 주었고, 술집 기생들도 돈을 모아서 시비를 세워주었는데 , 일반인들의 시인 사랑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고 하신다.
박목월 시인과의 친분관계를 물었다. 1953년 박목월시인이 ‘경주를 지나며’를 초회 추천했던 일, 1955년 현대문학에 완료추천을 하고 서울에서 활동 할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소년 황금찬이 소먹이꾼으로 살던 용솟골을 떠나 살았던 곳은 함경북도 성진 ,당시는 대도시였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독서모임도 만들어 책을 낭독했던 시인은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도 시인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곳에서 한국서점은 작고 일본서점은 컸는데, 작은 곳이 마음이 편하여 잘 들르곤 했다고 한다. 어느날 서점 주인이 곧 좋은 책이 나온다고 추천 한 책이 ‘문장’ 이었다. ‘문장’은 선생님 문학의 학교이며 스승이라고 하신다. 그 책에 추천제도가 있어 ‘난 됐다. 내가 추천받는다. 내가 안되고 누가 돼냐 ’ 자신을 했는데 되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시인이 된다고 자신했으니 참 우습지요?
선생님이 미소지으며 되묻는다.
선생님은 , 다른 사람은 어떻게 쓰나 비교해보기 위해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시를 읽어보았는데 선생님이 스스로 느끼기에 자신의 유치하고 시가 아니라는 충격을 받았다. 정지용 또한 실력이 있었는데 정지용이 경도에 가서 대학 다닐 때 독자투고를 한 시가 ‘프랑스 파리 ’였고, 일본 기디하라하큐노 시인이 1924년 등단시켰다고 한다. ‘문장’에서 신인을 결정하는 작가로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시조는 가람 이병기였다.
황금찬 시인의 추천사를 박목월이 썼는데 ‘어쩌자고 이런 시기에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는가, 등을 맞대고 눈물없이 하룻밤을 울고싶다’고 했다‘ 북에는 소월이 있고 남에는 목월이 있다는 말도 있을 만큼 박목월 시인은 당시에 평가를 받는 시인이었다.
후에 박목월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전쟁이 끝난 후의 앞날에 대해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50년 ‘시문학’이라는 작은 잡지가 광주에서 3호까지 나왔는데 (조지훈 편집) 그때 한 번 실으면 등단이 되는 가족제도였다고 한다. 선생님이 원고를 부치고 나니 6.25가 났다. 대구에서 피난 시절 박목월을 만났는데 작품은 싣지 않고 ‘황금찬의 시를 싣겠다’는 박목월의 추천사만 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조지훈이 나중에 술한 잔 사겠다고 하면서‘ 내가 술먹고 다니다 잊어버렸다’ 고 했다. 무엇이든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 ‘가난’을 이야기하는 시인은 ‘추억은 슬픈 기록이다’라고 이름 짓는다.
1951년 대구에서 또 박목월을 찾아갔었다. 선생님은 1군단 정훈부 종군작가였는데 헌병대 트럭을 타고 가다가 바지가 못에 걸려서 찢어졌다. 당시 바지는 광목에 검은 물을 들인 게 전부였다. 급한 김에 철사로 꿰매입고 박목월을 만났는데 문인협회지부에서 따라오다가 ‘아, 전쟁이 우리민족을 못살게 하는구나’ 우는데 그렇게 정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며 박목월 시인의 따뜻함을 회상하신다.
지연희 발행인이 다시 시의 파격적 경향에 우려를 하며 선생님이 강조하는 ‘시인을 기다린다’ ‘시인의 피를 바꾸자’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선생님은 ‘부러워할 것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이 옛날보다 더 모방을 하고 있으니 . 컴퓨터를 가자고 장난하는 일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모더니즘은 갔고 유물사관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까지 다른 나라 사람의 시를 모방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많은 사람이 이상을 논하지만 그는 기욤아폴리네르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21세기가 되었으니 우리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한다.
윤오영 수필가를 추천하신 분이 황금찬 시인이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잘 쓰는 역대 수필가 두사람을 꼽는다면 피천득과 운오영이라고 짚어주신다 . 피천득은 수필 문체를 여성문체로 만들어 정적인 문장이다. 요즘 작품들은 수필 문장이 거친 게 많다고 지적하며 작가의 역할까지 말씀해주신다.
사람들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행복’이다. 하지만 그곳은 쉽게 가지 못한다. 그 사이에 깊은 강물이 흐르고 험한 산길이 있어 아무나 가지 못할 때 작가는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길을 제시한다. 현대 그룹 정주영씨가 말레이시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를 공사하면서 너무 평범하니까 다리에 자동차를 세우고 커피 한잔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여백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작가는 독자들이 가고싶은 곳을 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어야 한다.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갈 수 있다. 도스또옙스키의 ‘죄와 벌’ 에 나오는 쏘냐와 청년의 사랑은 읽어보지 않으면 그 진가를 모른다.
누군가는 ‘작가가 이시대에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일이 뭐냐’는 무식한 질문을 한다.
작가는 바로 가지 못한 행복에 이르도록 다리는 놓아주는 것이다. 작품을 읽지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파고다 공원에 가보라 , 누가 그들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르겠는가.
시인이나 작가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를 비유를 들어본다., 여름에 등산을 하는 7-8명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다. 작가는 이처럼 독자들에게 물을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이름을 하나 더 가졌을 때는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작가의 이름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책임은 크다.
사람에게는 영혼의 눈, 지안. 육안 이렇게 세 가지의 눈이 있다며 밀튼과 갈릴레이일화를 들려준다. 영국 밀튼 시인이 44살 때 구라파 여행을 갔는데 로마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장님이 된 갈릴레이를 만났다. 당신같이 다른 사람이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말할 때 지구가 돈다고 했다. 그 때 갈릴레이가 대답했어요. ‘눈이 어두운게 아니다 . 다른 사람이 모를 때 아는 것을 지안, 못보지만 하느니을 볼 때 영혼의 눈, 나이먹었서 눈이 어둡다고 깔보는 것은 안된다. 다름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더 잘 듣는 것이다.’
감동을 받은 밀튼은 나중에 소경이 되었을 때 19살 난 딸을 불러서 장시를 써야겠으니 내 눈이 돼다오 했다. 그 때는 타자기도 없을 시대인데 아버지의 눈이 되어 써낸 작품이 ‘실락원’ 복락원‘ 이다. 소경이 되고 더 좋은 작품을 써낸 것은 갈리렐이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작품은 역시 출발이 제대로 되어야 작품 구실을 한다고 강조하는 선생님에게 지금도 새벽 두시에 취침하고 오전 6시에 일어나시는지 여쭈었다.
평생을 지키려고 하는데 간혹 신문이 오는 시간 5시 30분에 일어날 때도 있다고 하니 정신력이라 하야 할 지, 역시 큰 사람은 남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혹시 낮잠으로 보충하시는 지 물었더니 전혀 낮잠도 없다고 한다. 선생에게는 그렇게 하는 마음속 역할 모델이 있다. 일본 학자 가가와 도효히코인데 소설가, 시인, 과학자로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저서도 150가지나 된다고 소개한다. 그 사람을 존경하고 좋아하는데 동경 유학(고학이라고 강조함)때, 일본에서 강연이 있으면 어디든 갔다. 이유는 그사람은 오사까 빈민굴에 가서 한국 폐결핵 환자를 돌보고 시중도 들었다고 한다.
잠을 오래 자면 병에 걸린다며 이태준소설가는 ‘7시간 자는 것은 습성이다. 원시시대 먹거리는 많고 할 일이 없을 때 가졌던 습성이다’고 했다. 잠을 잘 때 꿈꾼 잠은 자지마라고 한다. 이날 나는 황금찬 시인 앞에서 원시인이 되고 말았다. 7시간 이상 자야하는 습성은 평생 못 고칠 것 같다. 선생님은 혼자 한글을 익힌 탓에 읽기의 기초를 닦지 못했다고 하면서 시인으로 대성하지 못한 이유로 꼽는다. 오히려 그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 쉼없이 책을 읽고 사색과 음악 감상으로 시심을 단련시키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의 창에 불이 꺼지고’시와 함께 이화여대 졸업반이었던 따님을 잃었던 이야기를 물을 수없었다. 더 어둡기 전 가을의 마지막 바람을 느끼며 낙엽 흩어지는 혜화동 거리를 걷기로 했다. 누구보다 시인을 위해 통일을 기도한다. 선생님은 , 지나가던 손님이 며칠씩 묵고가도 밥값을 받지 않은 , 죄없고 때묻지 않은 어린 날 개마고원과 풍산 황수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약력 : 1918년 강원도 속초출생. 1947년 월간지 <새사람>에 시를 발표하다. 1953년 <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중고등학교 고사 32년 재직하다. 대학상사, 교수로 25년 재직. 월탄 문학상 ,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외 다수 . 저서 시집 ‘ 현장’ 외 다수 .산문집 ‘고독이 남긴 그림자’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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