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발을 찬미한다-권남희 수필

권남희 후정 2010. 5. 2. 15:39

발을 찬미한다

                            권남희

                                 

유월의 어느  저녁  나는 호수를 걷고 있었다. 거리마다 월드컵 응원으로 넘치는 붉은 기운은 사람들에게  주술을 걸지 않는가.나는 문득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가 전야제에서 낭송한 ‘오프 더 사인’을 중얼거렸다. 그 때  갑자기 엄청난 함성이 호수까지 울려왔다. 폴란드를 이기고 포루투칼을 누르더니 드디어 이탈리아를  한국이 이긴 게 분명했다.   벅찬 감동과 함께 묘한 떨림이 나를 휘감았다. 이제부터 전국토가 우승을 기대하는 함성으로 유월을 흔들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발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끼며 내 어린 날을 떠올렸다.    

손재간에 비해 발재간이 형편없던 나는 발로 하는 놀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고무줄 놀이나 땅따먹기, 달리기, 하물며 축구는 엄두도 못내는 운동이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둥근 공을 손도 아닌 발을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굴려가면서   슛을 하는 모습은 발이 빚는  예술이다.  

밤새 이어질 것같은  함성 속에서 나는 세 남자를 생각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축구광이라는 것이다. 축구 메니아인 친정 남동생,  큰 경기 때마다 해설가를 자처하는 남편 ,그리고  역시 어릴 때 꿈이 축구선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축구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아들이 있다.

 첫 번째 남동생은 축구선수가 되는게 꿈이었다.  동생은 틈만 나면  아이들을 모두 모아서 축구시합을 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시합이 커져 옆 동네나 다른 학교와 축구경기를 벌이곤했다. 방학 때면 으례 아침먹고 나간 아이가 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의 애를 태웠다.

둘째 남동생은 축구를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형의 압력에 못이겨 늘 시합에 끌려다니면서 힘들어하는 게 역력했다. 시합에 지고 돌아오면 동생은 자기 때문에 진 것도 아닌데 형의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큰 동생은 축구선수가 되;고싶어 했지만 아버지는 ‘그깟 운동해서 어디에 쓸려고 하느냐’며 공부를 강요했다.   방황 끝에 동생은 선수의 꿈을 접었지만 동생 책상에는 언제나 축구경기 일정표가 있었고 큰 경기가 전주에 들어오면 학교를 빠지고라도 가서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아와 내게 자랑을 하였다. 동생의 노트에는 ‘이회택’‘조광래’등 지금 생각하면 꽤 유명한 선수들의 사인이 있었다.   

 동생은 지금 조기축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축구유니폼을 즐겨입는다.

이에 비해 남편은 선수생활을  동경하기 보다 축구경기관람을 즐기는 편에 속했다. 경기에 대한 평을 하고 각 팀의 골 득실점을  예상해서 내기를 걸거나 개인기와 매직축구의 맛보기를 좋아한다. 

연애할 때도 축구 시합이 있는 날은 아예 다방에 자리잡고 앉았다.  그 때 나는 골이 터지면 천둥치는 소리를 지르고 축구선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매달려 환호를 보내다가 때로 크게 낙담하고 마는 그를  보며 나와 다른 그의 정서를 이해하려 애쓰기도 했다.

아들의 꿈도 축구선수였다. 체격이 너무 약한 탓에 본인 스스로 체념을 했겠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상은 축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들은 중학교 때 새로 오신  체육 선생님이 국가 대표 축구선수였다며 그 사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TV 축구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그 선생님 역시 아들이 작기는 해도 발재간이  좋아 축구를 제법 잘한다며 귀여워했다.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축구시합을 하기 위해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느라  아침도 먹지 않고 달려 나가곤 했다.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동네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어디서  무얼할까 안스러운 마음에 쫒아가보면 그 때까지 아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새까맣고 비쩍 마른 아이가 땀 범벅이 되어 공을 차는 모습을 지켜보고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안타까운 마음에 시합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뭐 좀 먹어야되지않느냐’고 물으면 짜증섞인 투로 ‘안 먹어도 돼’ 하며 날 밀쳐냈다.  무슨 힘으로 저렇게 뛸까, 무엇이 저 아이의 열정을 끌어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마음이 아파서 때로는 아들이 축구하고 있는 운동장에 먹을 것을 해서 갖다 놓기도 하고 축구하는 아이들을 모두 불러들여 음식을 해주기도 했었다.

축구해설가를 꿈꾸기도 했던 아들은 지금 미술을 공부하지만 책꽂이에 꽂혀있는 스케치북에는 온통 축구 그림이다.

축구하는 사람들의 발을 본다. 200년도 안 된 축구역사지만 그 어떤 스포츠보다 많은 남자들의 혼을 빼앗아버렸다. 거칠지만 체계적인 룰에 따라 둥근 공을 몰아가는 그들 발에는  세상 남자들의  혈기가 넘쳐나고 있다.


‘...축구를 창조한 그 발을 찬미하노라...’-축구시인 안토니오 델토로-


*제 3수필집 ‘시간의 방 혼자 남다’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