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아브라함의 길 권남희 수필

권남희 후정 2010. 5. 2. 15:44

아브라함의 길

                           권남희

 그 해 여름은 잔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삶 그 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졌지만 어느 쪽으로도 홀로서기를 못한 내게 철퇴를 친 격이랄까.

 아버지의 그늘에서 아버지만이 인생의 항해사이고 신으로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불행이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던 내게 아버지의 교통사고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뇌를 다친채 하루 아침에 식물 인간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12살 아래인, 그래서 때로는 아버지에게 반 억지 응석을 부리곤 했던 어머니의 넋 나간 모습, 어린 세 동생,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한 변변한 친척이 없다는 사실이 끝없이 막막하게 했다.

 땡볕 아래서도 허물어지고 녹아 내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추위에 떨었다.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헉헉거리고 기도를 막는 가래 때문에 목을 뚫은 아버지의 모습은 ‘마침내 거듭되는 고난에 굴복한 채 이제는 나도 어쩌지 못하겠구나’  말하는 듯하여 아버지를 바로 보기가 두려웠다. 게다가 끝애 불효한 딸로 남았다는 죄책감이 나를 탈진시켰다.

 낮이면 동생들과 경찰서로, 검찰로 사고를 낸 운전수에게로 뛰어다니다가 저녁이면 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했지만 우린 서로 아무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쩌면 서로에게 풍겨 나오고 있는 절망과 공포를 읽으며 제각각 추스르기도 버거웠는지 몰랐다.

 다만 아버지가 누워있는 중환자실이 보이는 병원 길가에 돗자리를 깐 채 별을 보며 기적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우리를 버려둘 수 없는 의지 때문에 다시 일어날거라고 믿었다.

 동이 터 오면 밤 사이 저승 사자의 호출같은 ○○○씨 보호자 분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얼마나 내 쉬었던가.

 옆에 있던 다른 환자 가족들이 그렇게 한밤중에 불리워 갔다오면 어김없는 사망통보였다. 소생을 기다리던 환자 가족들이 낙심 천만하여 통곡하면 어머니도 덩달아 하염없이 울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하도 질겨서 어느 땐 어머니에게 버럭 화를 냈었다. 어머니의 무기력해져가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환자를 위한 기도를 권했다. 기도라는 말이 참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렸다. 아버지가 정말 기도 소리와 함께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요셉은 비록 냉담자였지만 살려만 주신다면 가족 모두가 천주교에 귀의하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는 주검처럼 누워있었지만 분명히 뭔가 느끼고 계셨다. 신부님의 기도 소리에 주르륵 눈물을 흘리셨다. 아버지는 가끔 혼수 상태로 누워서도 아버지 귓가에 대고 아버지 빨리 일어나야죠 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아버지는 종부성사를 받으신 얼마후 숨을 거두셨다. 형제나 일가친척없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종부성사라도 해 드린 건 참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천주교 공동묘지 언덕에 작은 비석과 함께 누우셨다. 나는 비석앞에서 맹세를 했었다. 이 길로 서울에 돌아가면 곧 바로 성당에 다니고 신실한 신자가 되리라. 그것만이 아버지를 위한 길이고 그 동안의 불효까지 모두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례 후 어머니와 동생들은 성당에 나가고 영세도 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맹세를 12년이나 유예시켜 왔었다. 그렇다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에 돌을 단 느낌, 숲정이 성당에 빚을 진 마음은 늘 버릴 수 없엇다.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잠자는 내 머리 맡에서 새벽기도를 올리며 지키지 않는 맹세에 침을 놓았다.

 그러던 중 먼저 영세를 받은 대학 동창이 예비신자 교리를 권했다. 기꺼이 교리 공부를 시작한 나는 드디어 스테파니아라는 이름의 신자가 되었다.

 물론 아버지와 가족들을 생각하면 뒤늦은 영세는 비 그친데 우산꺼낸 격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하도 대견하여 길가 집 노인네가 하릴없이 앉아 바깥을 내다보다가 사람만 지나가면 말을 걸 듯이 만난는 사람마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랑을 한다. 저 영세 받았어요. 본명은 스테파니아예요. 첫 순교자래요.

   제 3수필집 ‘시간의 방 혼자남다’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