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남희 수필

가끔은 전라도 말로 -권남희 수필

권남희 후정 2010. 5. 5. 07:55


가끔은 전라도 말로

                            권남희

     나는 남동생에게 어떤 경쟁의식이나 질투 따위는 추호도 갖고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면은 나도 모르는 의식이 깃들어 있나보다. ‘너를 낳았을 때  아들이 아니라고 화만 나면 내다 버리라고 했단다’   ‘ 남동생이 태어난 뒤 외가로 쫒겨가서 젖도 제대로 못 얻어 먹었어’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가 입력되어서인지 ‘ 키가 작은 것’ 이나 아버지가 화만 나면 집문서를 장자인 동생에게 맡기곤 했던 점에 대해 약간의 피해의식도 있다.

어쨌거나 좁쌀 친구 하나없는 외딴 집에서 반부새처럼 뛰는 나와 부룩 송아지모양새의 동생은 사춘기 전까지 유치하게 싸워댔다.

 올챙이 배를 한, 열 살도 안 되는 아이들이 눈만 뜨면 굼뜬 말로, 그것도 끝말은 더 늘어져 내씹듯한 전주 사투리로 싸워대는 광경을 ...

“ 긍게 시방 이게 니것이냐고오-  내가 눈 뜨고 봉게 있어서 맡았는디이-”

“ 왜 그려어- 마당에 있는 돌새끼는  다아 니거란 말여어? - 이 우멍한 놈아”

 마당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가 굴러다녔는데  자고 나면 늘   임자가  바뀌었다. 아주 작은 돌멩이를 가지고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기며 한바탕 드잡이를 한 후에 누구 것인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결정이 날 때까지   싸우다가   힘에 부치면 나는 동생의 얼굴을 할퀴기 일쑤였고 힘이 있는 동생은 나를 때렸다.  언젠가는 제법 큰 돌을 서로 맡았다고 싸웠는데 능갈치는 재주가 약한 동생은 말문이 막히자 욱하는 뚝심으로 큰 돌을 들어 내게 매다 꽂았다.  그 돌은 내 오른 쪽 정강이에 맞아 살점이 패이고 피를 많이 흘리게 되어 어머니가 나를 업고 병원에 다녔던 기억이  남아있다. 크고 심했던 흉터는 점점 희미해져가지만 흉을 볼 적마다  동생의 불끈한 성질을 확인하곤 한다.  점점 자라면서 동생이 나보다 커지고 힘이 세지자 싸움이 일어나면 나는 일방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싸움이 걱정되어 외출을 할 때면 동생에게  내리매기하듯 서열을 꼭 일러준 다음 전라도 말로 진한 욕까지 얹어 그루박고 나갔다.

“ 이 썩을 노무시끼! 엄마없는 디이- 누나 팼다가는 뒤지게 맞고 쫓겨날 줄 알어- 호랑이가 물어갈노무시끼- 부사리같이 미련한 눔이나 주먹쓰는거여- “


어머니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우리의 싸움은 사춘기가 되자 비로소 멈추었다.  열적어지기도 했지만 각각의 일상이 바빠져 비껴나가면서 덜 부딪히고 외부세상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후 우리는 세상을 향해  관심이 열려  껌을 쌌던 은박종이 한장에도 소유권을 주장하며 코피나게 싸웠던  마당을 잊고 살아갔다.


고향을 떠나 살아 온지도 오래돼서  잊은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말이 들리는 날이 있다.

“글탕깨로.......게욱질나서 겁절에 떨콰불써.”    

         

                         제 3수필집 ‘시간의 방 혼자 남다’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