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용

김영중 수필가 커버스토리 월간 한국수필4월호 2011년

권남희 후정 2011. 4. 25. 16:23

 

돌아와 거울 잎에 선

LA의 조경희, 김영중 수필가의 열정과 냉정 사이 그 아름다운 간격을 보다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정리 : 권남희 편집주간

일시: 2011년 3월 28일

장소: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

고희를 맞아 미국 LA에서 출판기념회를 조촐하게 치른 김영중 수필가를 서울에서 만났다. 왕성한 의욕으로 작가들을 발굴하고 재미 문학단체를 이끌며 재외 작가들의 정체성과 자아찾기에 멘토가 되어준 김영중, 한글문학 사랑에 고개를 숙인다.

정목일 : 고희를 맞아 수필집『사람과 사람사이』를 출간하고 출판 기념행사까지 치른 일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이번 수필집을 읽어보니 무언가 정리를 한다는 느낌과 보다 차분해진 인상, 영역수필을 넣은 점, 본문에서 제목은 일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소홀히 할 수없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독특한 편집이 눈에 뜨입니다. 관록에서 오는 것인가요?

김영중 : 인생무상이라고 벌써 70이 되었습니다 . 마음은 청춘이고 봄날인데 겨울이 멀지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프면서 찬란하고 눈물겹다고 수필 ‘4월의 서정’에도 밝혔지만 40년을 함께 했던 그를 보낸 지도 6년쯤 지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번거로울 것같아 기념행사는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80살을 보장 못하니까 축하연을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 초청장도 세 딸의 이름으로 냈고 작가들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평소에 가까운 분들 60명 정도만 모셨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문인들에게 부의금 받지말라고 당부하였다는데 아름다운 마무리지요. 이제 가볍게 살아야겠다,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자유롭고 품위있게 늙어가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책임져야 할 일도 줄어들고 고희까지 살고보니 이 나이도 좋아요.

: 미국에서 한국수필 발전의 개척자이며 신진작가 발굴로 재미 문단사에 큰 획을 그은 김영중 선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재미수필문학가 창립멤버이고 초대회장을 지내고 이사장까지 6년을 맡았는데 불모지에서 문학을 하려니 처음에 힘들었던 것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수순이었습니다. 초창기는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강사를 한국에서 초청하여 문학특강을 듣고 세미나도 개최하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차츰 수필인구가 늘기 시작하여 시와 소설 등 다른 장르와 함께 공조를 하며 활동하다가 수필장르의 활성화를 이룬 게 큰 보람입니다. 이제는 세대교체가 되고 있지요. 젊은 작가들이 문단을 잘 이끌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정: 언제나 처음 무언가 시작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재미수필문학가협회와 엘에이 크리스챤 문학회 창립회장을 맡아 문학인구의 저변확대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문학을 보는 엘에이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김: 당시는 프로 작가가 된다는 것보다 이민생활에서 겪는 애환과 정서를 나누고 모국어로의 소통을 원하는 의미가 컸지요. 모두 그렇다고 볼수는 없지만 이민 1세대들의 미국 생활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직장과 교회와 마켓 , 가족모임 정도이지요. 수필교실 오면 다른 데서 듣지 못한 아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가장 큰 기쁨은 모국어로 글을 쓰고 나중에 작가로 등단하여 자기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행복하지요. 자녀들도 부모가 작가활동읋 하니 좋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소재들도 거의 향수를 달래는 어머니, 고향그리기 등 한정되었는데 이제는 세련돠어지고 다문화 속에서 다양성을 갖추었습니다.한국이나 미국이나 인터넷의 발달로 평준화되었다고 봅니다.

정: 엘에이에서 <수향>수필교실을 개설하여 수필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문학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겠지요.

김: 문학교실을 개설 할 때는 자아와 정체성 찾기의 안내자가 되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였습니다. 처음에는 학교시절 문학 소년소녀의 꿈을 갖고있던 분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고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외로움과 소외감에 문득 ‘나는 누구인가? 자괴감에 빠져버리지요. 안타까운 점은 미국도 남성보다 여성작가가 많고 노년층이 많은 부분,등단하고도 작가활동읋 할 수 없는 여건에 처한 후배들을 볼 때입니다. 문학정신이 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글쓰기는 많은 독서와 사고력기르기, 충분한 퇴고가 뒷받침돼야 하지 않겠어요.

정: 2세 3세들의 한국진출 연예인 활동은 적극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어 문학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요?

김:이민 2세 3세들은 이미 영어권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영어로 살아갑니다. 작가로 활동하는 후세들도 모두 영어로 쓰지요. 이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글문학이 우리 세대에서 끝나지 않을까하는 추측입니다 .한국인 2세 3세들이 한굴문학을 읽고 싶어도 말은 가능하지만 독해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들을 위해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사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정: 미처 깨닫지 못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한국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살면서 모국어로 문학활동을 하는 것은 자긍심을 주는 것도 있지만 정서적으로 거는 기대치도 있다고 봅니다. 한국수필가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김: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 자주 교류하고 더 소통하면서 작품세계를 구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한글로 문학활동을 하는 세대도 우리가 마지막이라는 판단이 들 때가 있습니다.

: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재외작가들에게 원하는 부분은 외국작가들과의 교류활동입니다. 공동집필이나 공동 문학행사같은 소통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이 부분이 약하다고 느끼는데 단순히 언어 장벽 때문인가요?

김: 사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글로 교육받은 후 떠난 이민 1세대나 1.5세대가 그 나라의 언어권에 진입하여 작가활동을 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을 분석해보아도 힘든 일이지요. 자기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하면서 자녀들 뒷바라지를 해야하니 우선 시간이 없고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신분문제도 핸디켑이겠구요. 생활이 안정이 되지않은데 문학을 게다가 영어로 하면서 외국작가들과 교류를 하는 것은 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한국수필가협회를 처음 창립하셨던 월당 조경희 선생과의 인연을 말씀하지 않을 수 없지요. 각별히 지내셨고 늘 그림자처럼 같이 움직였다고 봅니다.

: 잊을 수 없는 분이지요. 언제나 어디서나 조경희 선생은 그리운 분입니다. 누군가 그리우면 저는 바닷가에 선다고 글을 썼는데 바다에 가면 더욱 생각나는 분이지요, 처음 김남조 선생이 저에게 조경희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월당 선생님이나 저나 기질적으로 서로 알아보고 통했는지 처음 보는 자리에서 ‘엘에이 조경희’라는 칭호를 주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그 후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을 할 때 세미나공동주최를 제안하여 엘에이 그랜드호텔에서 행사를 추진하였고 한국수필가협회가 세계 어디에서든 세미나를 하면 참석하여 질의나 좌장도 맡엇습니다. 월당 선생 덕분에 한국문단에서 빨리 크고 그만큼 알려지기도 했다고 봅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는 부분이고 그만큼 한국수필가협회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정: 감사드립니다. 이제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도 마련하였으니 한국에 오시면 언제라도 들러주시고 후배들과도 동행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늘 행복하십시오.

김영중 약력

중앙대학교 영문과 졸업. 『창조문학』으로 등단.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 이사장 역임.미주크리스챤 협회회장. 이사장 역임. 한국문인협회회원.한국여성문학인회 회원 (사) 한국수필가협회 해외 부이사장 .제 1회 해외한국수필문학상 .소월문학상.미주 펜문학상 .

작품집『건넛집의 불빛』『기다림으로 접은 세월』『바람속을 걷는 인생』『하오의 사중주』1,2집이 있음 .『사람과 사람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