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승 작가 (2011. 2.28 권남희 편집주간촬영)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신봉승 작가
문필의 시작은 시였으나 역사을 알면서 행복했었노라, 보람도 있었노라! 말하는
신봉승 작가를 매화차를 들고 이월 끝자락에서 만나다
일시 : 2011년 2월 28일 월 오후 3시
장소 : 관훈동 백상 빌딩 10층 역사문화 연구소
대담 : 권남희 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촌놈을 사랑한 사람들 !
신봉승 선생은 원고지 5만 8천장에 달하는 『조선왕조 500년』48권을 펴냈다. 다산 정약용의 과골삼천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엄청난 업적에 할 말을 잃는다.
130권의 저서는 물론 정주영현대회장 등 정,재계에서 ‘일가견’을 이룬 우리시대 숱한 인물들을 만나온 선생, 재능있는 예술인들과의 인연도 넓고 교분도 두텁다. 신상옥 감독, 천상병시인, 배우 황정순, 차범석 희곡작가, 정연희소설가, 김수용 감독, 전숙희 수필가, 등 헤아릴 수 없고 문학을 배운 은사로는 황순원 .황금찬. 조병화 선생 등이 있다. 연줄의 복은 어디서 올까, 무심한 듯한 순박함이다. 선생이 말하는 ‘촌놈’이기에 사랑받지 않았을까.
오른쪽부터 권남희 수필가(월간 한국수필 편집주간) / 신봉승 작가/ 권혁승 시인
신봉승 선생은 MBC TV사극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10년동안 집필한 드라마 작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시작은 시인이었다. 1957년12월호 현대문학에‘이슬’이 청마 유치환 선생의 추천을 받으면서 등단한다. 강릉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선생은 시인이 되기 위해 아내와 4살된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온다. 친척도 없는 서울 두 평 짜리 셋방에서 시를 쓰고 매일 굶기를 얼마나 했던가. 친구가 라디오 드라마를 써 보라고 권하여 아내가 사다준 라디오를 보름동안 듣고 「월급봉투」를 써 냈다. 작품이 히트하여 영화가 되면서 일약 팔리는 작가가 된다. 30대는 장르상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썼다. 역사문화연구소 사무실 벽에는 <두고 온 산하> 첫 영화 작품 포스터가 걸려있다. 1961년에는 첫 사극 <사모곡> 으로 유명해졌다.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
최근 선생은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이고 나라에도 격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가란 무엇인가』리더십 책을 냈다. 국가는 없고 정당만 있는 나라, 학교에도 국가는 없고 입시만 있는 나라는 절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조광조 등 덕망있는 선비들이 정치를 했고 조선의 정치 지도자들은 일세를 풍미한 문장의 대가들이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요즘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기업체와 중앙부처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그 원천은 역사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다고 본다. 가면 안 되는 쪽으로 흐르면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역사에서 깨닫고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는 말로 알려준다.
고전을 활용해 아이디어와 콘텐츠를 얻는데 달인이라는 평을 받는 선생의 내공은 국보 151호 이며 유네스코 기록 유산인 조선왕조 정사기록을 장장 9년에 걸쳐 정독한 점에 있다.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단 것 !
물론 역사드라마를 처음 시작할 때 야사에 의존하다가 ‘신봉승 드라마는 틀렸다’는 아픈 지적을 받아들여 독서를 시작했다. 현재의 사극들이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사건에만 치중하는 점을 지적한다. 정신을 보지 못하는 자격없는 사람들이 사극을 만들고 있는 부분을 경계하라 한다.
선생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봄날 씀바귀나물의 맛으로 다가온다. 입은 쓰지마 몸은 단게 씀바귀 나물의 속성이다.
문학인이라 이름을 얻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충고하는 메시지라 느낀다. 노력하지 않고 얕은 상식과 상투적인 글을 나열다가 범하는 오류가 많기 때문이다.
선생은 1993년 역사에세이 『여섯 사람의 대통령』을 출판했다. 작가로서 부럽기도 한 부분이고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건드렸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라 할 수 있는 사실적 자료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도 궁금했다.
선생은 51세에 시작하여 10년의 황금기 동안 100% 역사에 묻혀 살았기에 행간을 읽는 달인이다.10년 동안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을 쓰는데 소진하였던 선생은 역사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 1919년 3,1만세운동을 했다’고만 외우지 배경이나 이유를 통한 아해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역사 뿐만 아니라 책을 읽을 때도 문자로 읽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다 잊어버린다. 물론 시작은 그렇게 하지만 읽기가 깊어지면 세상보는 눈이 달라진다. 남의 비방이 느껴지고 작가의 의도가 보이는 것이다. 철학책을 읽어도 소용없다. 역사책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독서법이 글을 제대로 쓰는 일로 연결이 된다.
선생의 말은 한 마디도 놓칠 수 없다. 독서력이 쌓이지 않으면 단편적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현대사회는 더 혼란스러워 행간을 읽기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할 수 밖에.
신봉승 작가의 저서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
10여 년 간 선생은 일 년이면 절반 정도를 기업체나 정치인들에게 특강을 했다.최근에는 중앙지검서 ‘행간으로 읽는 역사’ 강의에서 세종의 리더십을 강의했다. 역사는 죽어있는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가지 씩 착한 일을 하면 복은 몰라도 화는 막을 수 있다고 한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선생님께 다시 듣고 싶어 '문학관' 이야기를 꺼냈다.
2004년도 강릉 시립도서관에서< 초당 신봉승 예술기념관>을 개관했고 방대한 자료를 선생님이 기증했다. 강릉이 문화예술의 고장이라는 생각에 부러움도 일었다. 선생은 특유의 싱긋 웃는 표정으로 ‘나의 50년 작단생활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배려된 아름답고 보람찬 공간으로 고향이 내게 베풀어준 큰 은혜라는 생각을 한다’며 귀거래사 명분을 만들어준 일에 감사했다. 집필 때만 걸쳤는데 팔꿈치에 구멍이 난 점퍼와 2백여 개의 초록색 잉크, 장서, 애장품 등 그 곳에 가면 선생의 문학적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방문의 기회를 가지리라 마음먹는다.
왼족부터 권혁승시인(전 매일경제신문사 사장). 신봉승 작가. 지연희문파문학 발행인
시, 평론, 산문, 시나리오 등 문학장르를 두루 거친 선생에게 문학인들을 위한 한 말씀을 부탁 드렸다.
"사람이 되지 않았는데 시만 잘 쓰려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좋은 시를 쓰려고 하지말고 몸뚱이가 시가 되려고 애를 써야지......"한다.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기에는 고통스럽고 시간이 상당히 걸리겠지만 노력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인사동 네 거리 역사문화연구소에서 봄날이 밝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신봉승 선생이 계시기 때문이라.
신봉승 약력 1933년 강릉출생. 강릉사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에서 문학평론을 추천받아 문단에 나왔다. 한국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 대종상.청룡상 심사위원 역임.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 중. 한국방송대상, 대종상, 청룡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한국펜문학상 등 수상 . 보관문화훈장 받음.
저서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전 48권 『소설 한명희』전 7권 『조선 정치의 꽃 정쟁』등. 역사에세이 『조선도 몰랐던 조선 』 『조신 지식인의 리더십』『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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