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7월호 커버스토리 2011년
문학으로 아픔도, 울분도 풀어냈던, 치열한 시대 정신의 소유자
정혜옥 수필가
여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다. 심사 위원이었던 노천명 시인이 시 낭송을 시켰다. 나는 목 메임 때문에 끝까지 시를 낭송할 수 없었다. “내 조국은 찬바람 부는 언덕을 넘은 곳 / 외로움은 가을 부나비처럼 /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쟁을 치른 조국의 환란이, 촉석루의 수난이, 그런 황량한 땅에 엎디어 있는 국화의 외로운 혼이 나를 목 메이게 하였다.
일시: 2011. 6. 22. 수
장소: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실
대담: 정목일수필가(본회 이사장)
정리: 권남희 편집주간
정목일 : 7월 15일에 있을 제 4회 올해의 수필가상 수상을 앞당겨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다른 문학상도 많이 수상하셨지요. ‘문학과 인생’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혜옥 : 그저 활자가 좋았기에 어려서부터 책을 읽었습니다. 때문에 책과 함께 숨을 장소를 찾아 달려가던 행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요. 글 읽기의 시작이 바로 나의 문학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고향은 진주입니다, 정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진주성, 서장대, 촉석루,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의암(義(의)岩(암)), 남강가에 서면 언제나 이런 것이 눈에 들어왔었지요. 침략자에 대한 분노가 솟아오를 때마다 표현의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문학이었던 것 같아요. 진주가 배출한 많은 문인들 가슴 속에 치열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여학교 시절, 백일장에 참가하였는데 어쩌다 장원을 하였습니다. 시제(詩(시)題(제))가 국화였고 그 날 심사 위원이었던 노천명 선생님이 시 낭송을 시켰지요. 나는 끝까지 시를 낭송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수줍음 때문이 아니고 목 메임 때문이었습니다.
“내 조국은 찬바람 부는 언덕을 넘은 곳 / 외로움은 가을 부나비처럼 /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구절쯤에서 나는 목이 메고 말았는데 전쟁을 치룬 조국의 환란이, 사흘 밤낮을 불타올랐던 촉석루의 수난이, 그런 황량한 땅에 엎디어 있는 국화의 외로운 혼이 나를 목 메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학은 나의 아픔도 풀어내고 울분도 풀어내 주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문학은 나의 구원이었던가, 자문 할 때가 있었지만 문학은 나의 구원이고 구도라고 여겨 문학과 나의 인생은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바라보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문학적인 자세가 때때로 힘겨울 때가 있었어요. 무감동 무감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매우 편안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문학을 나의 삶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 글을 쓰는 고통보다 글을 쓰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목: 대구수필가협회의 초대 회장과 2대 회장을 맡으면서 대구지역의 수필사랑에 역할을 해주신 소감을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혜: 현재 대구수필가협회원이 190 여명인데 회원이 아닌 수필가도 적지 않습니다. 대단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만큼 수필을 사랑하고 수필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지요. 대구 수필가협회가 창립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수필의 문학성을 인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것, 즉 매일신문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신춘문예에 수필 장르를 포함 시키는 일이었거든요. 다행히 신문사의 배려로 신춘문예에 수필이 신설되었고 해 마다 전국에서 응모하는 수필 작품이 500편이 넘고 있지요. 대구 수필가들은 모두 글을 잘 쓰고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 수필 교실에서 유능한 선생님들이 수필의 올바른 길을 지도하며 수고하는 바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대 구수필가협회의 앞날은 밝다고 봅니다. 선출된 회장님과 임원진들도 신명을 다해 일을 하고 모임에서 만나 얼굴을 보면 반갑고 헤어지려고 하면 섭섭하여 오래오래 둘러앉아 있는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정목: 선생의 전공은 미술이지만 수필과 남다른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요.
정혜: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과 문학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작업의 번거로움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접근성이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나는 수필쓰기를 윗길에 두고 있습니다. 또 살림살이의 틈틈이, 조각 난 휴식의 시간에 글을 쓰는 일을 많이 하고 있어 행복을 느끼지요. 한 밤중, 혼자 깨어있는 시간의 자유를 즐기며 수필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술 교사 십년 간을 돌이켜보면 참 좋은 시절이었어요. 그 시절의 글에 대한 열정, 그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내면의 아픔 같은 것이 되살아나기에 지금도 나는 꿈을 꿉니다. 아늑한 화실 한 칸 만들어 그림을 그리는 꿈을, 수필을 통하여 나를 표현하듯이 그림을 통하여 나를 표현하는 꿈을. 구도와 원근법에 묶인 엄격한 화면이 아니고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는 것 같은 선과 색채를 자유롭고 분방하게 풀어 내는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스케치 북과 이젤을 들고 감동의 장소를 찾아 헤매던 날의 설렘, 마지막 붓을 던진 후의 미진(未(미)盡(진))의 전율, 이런 것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습니다.
정목: 문학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
정혜: ‘글이 말을 한다.’ 자주 들어온 말인데 두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수필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 않나요?. 범람하는 책, 무한대로 확장되는 수필공부, 자유로운 체험들, 하지만 체험들이 바로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오영 선생님이 생존해 계실 때 찾아 뵌 적이 있어요. 작은 문간방에서 책속에 묻혀 계셨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나를 만약 강단에 세워 준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어, 요사인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성급하게 무언가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아. 가령 아름다운 노을을 보았으면 아, 곱다 하고 바로 수필로 쓸 것이 아니라 며칠을 두고 보고 또 바라보며 노을 속에 감추어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해” 하셨어요. 아마 선생님은 석양의 빛, 석양의 허무까지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 같았습니다. 그날 주신 수필집『고독의 반추』는 지금도 수필교과서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래 바라봄, 오래 귀 기울임, 오래 침묵함. 마침내 얻게 되는 문장에 대한 확신. 이런 순서를 나도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정목: 베이비붐 세대들이 은퇴하면서 수필가로 등단하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를 부탁드린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정혜: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자아실현을 하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다만 수필에 접근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었던 말이나 신변잡기를 쓴다는 안이한 생각이 아니라면 살아오면서 쌓아온 세월의 내공이며 깊은 사유 같은 것이 수필의 문학성에 큰 자산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정목: 한국수필가 협회에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정혜: 한국수필가 협회는 현대수필 역사에 있어 우리나라 최초로 발족한 단체여서 매우 역사가 깊다고 봅니다. 처음 한국수필을 이끌고 가시던 조경희 회장님의 열정적인 모습이 생각납니다. 한국수필회가 주관하던 그 많은 수필 세미나, 그때 우리는 오직 열정 하나로 경주로, 전주로, 지리산으로, 마산으로 참 많이 모여 들었습니다. 밤을 새며 문학을 논하고 수필을 논하였고 한판 신명나게 노래도 불렀습니다. 수필인구의 저변 확대, 수필 문학의 질적 향상, 수필문학의 위상 제고를 위해 노력하신 한국수필가 협회의 역대 회장님들과 임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앞으로 전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수필가들을 아우르는 뿌리로서의 역할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목: 바쁜 중에도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모든 수필가들을 아우르는 힘을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수필가 정혜옥
경남진주 출생.진주여고, 부산사대 미술과 졸업.
포항, 김천여중고, 대구 제일여중고, 등 미술교사 역임.
수필집 단행본 <대숲에 이는 바람> 세음사.<진달래와 흑인병사> 범우사
<이 세상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무> 범우사
<우체국 앞을 지나며> 그루사.<돌미나리를 찾아서> 그루사
<강물을 만지다> 선우미디어
수필선집<풍금소리> 선우미디어.<타 관의 풀> 좋은 수필사
수상 개천 예술상.현대 수필 문학상.대구광역시 문화상.2011.7월 제 11회 수필의 날 -올해의 수필가상
경력
한국 수필문학 진흥회 이사.대구 문인협회 부 지회장
대구 카톨릭문학회, 여성문학회 회장
대구수필가협회 회장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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