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

2014년 월간 한국수필 2월호

권남희 후정 2014. 2. 4. 15:52

 

                              발행인 정목일 .  편집주간 권남희 .  정기구독 02-532-8702-3 

  

고택(古宅)의 미

 

정 목 일  수필가(한국문협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목향수필회에서 일 년에 한 번 갖는 나들이 장소를 경북 봉화군의 ‘토향고택(土香古宅)’으로 정했다고 알려왔다. 봉화도 낯선 곳이고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도 처음이어서 자못 기대가 되었다. 

아침에 마산에서 출발하여 점심 때 쯤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도착하였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공간에 있다. 소수서원과 곁에 있는 선비촌을 구경한다. 소수서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을 가려면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춰야 한다. 키 큰 소나무들이 하늘을 치켜 오른 모습을 보면, 저절로 경탄이 솟구쳐서 나무와 하늘을 두루 바라보게 된다. 미끈한 몸매로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들의 모습은 군자(君子)나 선비 같다. 불그레한 둥치와 녹색의 잎새가 대조를 이뤄 하늘을 배경으로 도도하고 멋들어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몇 백 년 자란 소나무들과 대화를 나누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일 년 간 삶의 발견과 깨달음을 한 줄씩 목리문(木理紋)에 새겼을 나무들을 생각한다. 수백 줄의 목리문으로 자신의 일생을 아름다운 추상화로 아로새겨 놓았을 거목들의 자태는 기품이 있다.

 

소수서원 앞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송림 속 냇가에 정자가 보인다. 신선이 한담을 나누던 공간일 듯하다. 주변에 소나무들이 정자를 호위하듯 둘러쳐서 절경의 운치를 돋우고 있다. 어디서 학이 날아들고 거문고 가락이 흘러나올 듯하다.

  선비촌을 거닐어 본다. 고택과 마을의 고샅과 골목을 살펴본다. 인간의 삶이 자연 속에 있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지어 종일 밝은 햇살을 받고 바람소리, 물소리 들으며 자연과 마음이 닿아 있었다. 선비촌에 살던 이들은 간 곳 없지만, 청청한 소나무들만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저물녘 봉화읍 해저1리(바래미), 예정된 숙박지 ‘토향고택(土香古宅)’을 찾아갔다. 벌써 어둠이 깃들었다. 일행들과 환담을 나누다가 오랜만에 온돌방에 요를 펴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등허리와 몸에 스며드는 군불의 온기는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실감나게 한다. 한옥에서 살아본 한국인이라면 온돌방에서 겨울밤을 보내보아야 고향에 온 것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다. 방문의 문풍지를 부르르 떨게 하는 바람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한 번도 온돌방에 등을 대보지 못했다. 온돌방에서 태어나서 자랐던 한국인들에겐 따뜻한 온돌방의 온기를 잊을 수 없다. 한옥(韓屋)의 구조는 우리나라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온돌방과 더운 여름을 보내기 위한 대청을 주축으로 이뤄져 있다. 방에 누웠을 때, 등에 따스한 기온이 감돌아야 심신이 풀리며 포근히 잠들 수 있었다. 감기가 걸렸어도 온돌방에 이불을 둘러쓰고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온돌방이 있었기에 추운 겨울을 나며 가족과 이웃끼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아파트의 침대생활을 하면서도 온돌방에서 겨울밤을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새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 방문에 여명(黎明)이 밝아 있다. 고택에서 맞은 아침이 방문에 닿아 있다. 한지 방문에 온 환한 아침과 만난다. 유리창으로 투과되는 빛과는 달리, 한지 방문에 젖어있는 아침빛은 정결하고 환하다. 빛을 방문에 머물게 하는 장치는 한지방문 밖에 없으리라. 뒷동산에서 산새 소리가 들려온다. 동리 어디선가 닭이 목을 빼고 아침이 왔음을 알려준다. 방문에 환히 닿아있는 아침빛과 닭의 인사를 듣는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다. 마을 한 쪽에서 개 한 마리가 소리를 높여 신호를 보내듯 짖어대자, 여기저기서 호응하여 개들이 일제히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다.

   

비로소 토향고택을 살펴본다. 자연 속으로 열려 있는 단아한 집 한 채이다. 송림(松林)이 우거진 뒷산을 배경으로 남향(南向) 터에 자리 잡은 ㅁ자형 양반집이다. 집터를 정할 때에 햇빛이 가장 잘 들고, 뒤편에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진 곳을 택하였다. 기와집 한 채는 자연 속에 이룬 이상세계의 구현이나 다름없었다.

 

토향고택(土香古宅)은 1876년(고종 13년) 통훈대부를 지내고 봉화초등학교 전신인 조양학교(朝陽學校)를 설립(1909년)한 암운(巖雲) 김인식(金仁植) 선생이 건립하였다. 5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큰사랑방과 큰사랑마루가 있고, 사이에는 대문채 좌측에서 큰사랑까지 연결된 담장이 있어 그 사이의 통로를 지나 안대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가게 된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가 큰 ㅁ자형의 주택이다. 안채 부분의 평면은 부엌, 안방, 대청이 연결된 일자형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택의 현판(懸板)‘토향(土香)’은 김인식(金仁植)의 손자 김중욱 (金重旭 1924~1967)의 호(號)다. 중앙고보(中央高普)와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를 졸업한 후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관을 지냈다. 김중욱은 일제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만주에서 행군도중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아들 김종구(金鍾九)가 일찍 작고하신 선친을 기리기 위해 ‘토향고택’이라 명명하였다.

   

별채엔 ‘광운시사(廣雲詩社)’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곳엔 인근의 시인묵객들이 모여 자작시를 읊고 논하던 시동인회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토향고택 안 쪽의 건물의 기둥 세 개에 한글 궁체로 쓴 현대시조가 눈길을 끈다. 초장, 중장, 종장을 각각 하나씩의 기둥에 붙인 세로 현판이다.

  

드러내 보일수록 드맑을 수 있다니

  모난 돌 품어 안아 조약돌을 빚어내는

  저만치 바라만 봐도 가슴 벅찬 사람아

   

시조시인인 안주인 ㄱ씨의 시조이다. 광운시사’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침의 서기를 받으며 고택의 대문을 나와 마을을 둘러본다. 산이 마을을 품고 있다. 햇살이 마을에 광명을 안겨 준다. 송림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나무 위에서 새소리가 저들끼리 지저귀고, 닭들이 아침 인사를 나누고, 개들도 소리로써 존재를 알리고 있다. 풀잎의 이슬도 영롱하다.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고택에서 느끼는 것은 자연과 삶의 어울림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아름다움의 발견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송림이 우거진 청산(靑山)을 배경으로 양지 바른 곳에 기와집 한 채를 짓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어 했다. 고택에선 자연의 숨결과 순리를 느낀다. 삶의 공간만이 아닌, 한 채의 기와집은 자연의 품속에 안긴 삶의 터전이자 이상향의 공간으로써 자리 잡고 있다. 그 이상향의 한 공간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 예사롭지 않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선 찾을 수 없던 새벽의 기운과 아침의 광명을 맞이해 본다. 목재로 지은 집의 안온함과 뒷산 소나무 숲의 바람소리를 들어본 것만으로도 고향을 찾은 듯하다.

  한국 고택은 자연과의 조화와 어울림의 공간에 있다. 삶의 터전과 사람의 마음을 포근히 안아주는 청산 아래에 있다. 해가 뜨면 밝고 따스한 햇살을 받을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에 있다. 한국인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어 했고,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한국인은 송림이 우거진 뒷산을 배경으로 한 채의 기와집을 안고 살고자 했다. 그곳이 곧 청정의 공간이고 이상향이라 여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