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세이 2015년 2월호 수록 원고
우아한 부엌
권남희
전주토박이 어머니가 하는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누군가가 말한 제 5의 맛인 감칠맛 때문일까. 돼지뼈다귀를 고아서 끓인 우거지 탕, 풋고추 볶음, 솎음 배추국 ,황석어 젓갈로 담근 김치, 마늘 닭백숙, 끝물에 떨어져 익지않은 토마토로 담근 장아찌. 무절임 된장박이 등.......
솥이 걸린 아궁이, 불 때는 정지 흙바닥에서 어머니가 신바람나게 움직이면서 뚝딱 해내는 음식은 가족들에게 에너지를 주었다. 그런데도 황해도출신으로 김치는 백김치를 먹어야하는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양념이 세다는 거였다. ‘짜게 하지마라’ ‘맵게 하지 마라’ 아버지가 하는 주문에는 ‘양념사치가 심해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불만이 따랐다. 가족을 위해 애를 쓰는 마음이 넘쳐져서일까, 음식마다 양념을 많이 쓰는 엄마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한줌씩 더 집어넣기 때문이었으리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우리 부엌은 늘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들썩거렸다. 겨울김장부터부터 결혼이나 집에서 치르는 초상........갖가지 애경사까지 동네의 품앗이를 결정하는 장소가 되었다. 농사짓는 우리 집은 새벽시장에 넘기고 남은 오이, 가지, 토마토, 푸성귀 등이 푸짐하고 풍요로워 보였을까, 오후 서너시 무렵이면 동네 아줌마들과 막걸리 한 잔하면서 음식품평 모임을 하느라 골목까지 떠들썩했다. 김치를 담았다고, 전을 부쳤다며, 멸치젓을 담는다는 등 무슨 먹을거리 핑계를 대서라도 아줌마들은 모여들었다. 주부들을 위한 취미교실은 없고 흑백 TV뉴스에서는 가끔 춤바람 난 주부들을 일망타진하는 장면이나 내보내는 시절이었으니 아줌마들은 거실도 없는 10평 규모 국민주택 아궁이 앞으로 모여들어 음식을 화두로 시끄러웠다. 가끔은 쥐새끼 때려잡는다고 난리를 치면서 음식과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흥이 넘치는 그 부엌은 늘 떠들썩했다. 나는 그 활달함이 좋았지만 아줌마들은 왜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먹고 배추김치 하나를 놓고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저렇게 좋아하고 떠들까, 그 툽상스럽고 촌스러운 분위기가 못마땅하여 부엌 쪽으로는 제대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가정시간에 배운 샌드위치나 멋진 샐러드 만들기를 꿈꾸며 언제 부엌을 차지해볼까 염탐했다.
어느 봄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모임 친구들을 초대했다며 잔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네 아줌마들과 막걸리 놓고 젓가락질하던 푸성귀 반찬수준이 아니었다. 마당까지 화덕과 솥을 끌고나와 요리를 하는 어머니는 동네 아줌마들과 어깻바람을 내며 새로운 음식들을 계속 만들어냈다. 민물 장어구이, 신선로, 색깔을 맞춘 나물, 연꽃잎모양으로 깎은 사과 등등 요리도구라고는 솥단지 몇 개와 가마솥뚜껑이 전부처럼 보이는데 겉어림으로 하는 것 같아도 명품요리가 줄을 이었다. 그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진달래 꽃잎을 올린 찹쌀 화전이었다; 요리를 언제 배웠을까 ? 의아하게 생각하며 화전을 부치는 어머니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다시 보였다. 평소에는 아무리 뒨장질해도 별 것도 나오지않던 부엌인데 생전 처음 우아한 상차림을 본 것이다. 그 후 어머니의 부엌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할 일 없이 막걸리나 먹었다고 생각했던 동네 아줌마들은 모여서 요리교실을 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가슴속으로 열망하던 우아한 요리들을 마을 잔치 때마다 모여 합숙훈련처럼 같이 잠자고 먹어가며 풀어내고 있었다.
그 때 감동받아 마음에 품었던 ‘품앗이 부엌’을 향한 부러움은 오래갔다.
나도 언젠가는 손님을 초대하여 떠들썩하게 요리를 하고 화전까지 만들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나의 부엌은 세 개의 냉장고와 가스레인지와 터무니없이 많은 그릇들로 쌓여있지만 부엌만 갖추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식구도 줄었고 친척도 찾아 올 일이 없는 집은 너무 조용하여 풀죽어 있을 뿐이다.
같이 먹고 자며 집안일 품앗이할 일가도 없으니 무얼 만들어도 정성이 없는지 구드러지고 공부한대로 요리 해도 개개풀어지는 바람에 이미 자신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로 인해 늘 행복했던 나의 고향 전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맛의 도시로 선정된 지 몇 년 되었지만 이제 어머니도 계시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
우아한 부엌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 수필당선. 현재(사)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MBC아카데미 수필교실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강의
작품집 《육감&하이테크》외 다수
이메일 : stepany1218@hanmail.net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156. 엘지 팰리스 19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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