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까는 날
권남희
양파 껍질 벗기기는 어느 누구도 울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아하게 화장한 날은 양파를 건드리지 말 것이다. 최루탄 못지않은 양파의 술폭시드 성분이 분무기처럼 얼굴에 뿌려지면 눈물은 트로트 가락처럼 구슬프게 흘러내리고 만다. 굳이 울지 않으려 애를 쓸 필요도 없다. 그저 물세수한 얼굴로 침착하게 ,벗겨지는 껍질만큼 울어주면 될 일이다. 언제나 웃음 띤 얼굴인 채 밝아야할 뿐 마음 놓고 울만한 곳도 찾을 수 없는 세상, 양파 까는 날처럼 핑계 김에 울기좋은 날이 어디 있을 까.
양파 한 박스를 받았다. 장아찌 만들기 좋은 크기다. 양파가 풍년이라 길가에 잔뜩 쌓아두었다고 하니 그 또한 가슴이 멍해져 양파 한 상자를 보고 벌써 울컥하여 눈물을 찔끔거린다. 농사짓는 이의 노고와 애잔한 마음이 보여 안타까운 것이다.
네팔 지진을 집중 보도하고 있는 Tv 앞에 양파를 쏟아놓는다. 큰 마음먹고 딴청부리듯 해찰하며 양파를 깐다. 몇 개를 깔 때만해도 견딜만했는데 자제했던 나의 눈물샘이 터졌는지 슬슬 눈이 따갑고 눈물이 질금거리기 시작한다.
문화유산도 무너진 네팔, 주저앉은 집 사이로 구조하는 장면이 너무나 더디다. 집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취약한 장비와 애타는 가족들의 모습만 클로즈업된다. 너 댓살 남자아이가 동생으로 보이는 두 살 정도의 여자아이를 감싼 채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장면에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 앞길이 막막해 보여 양파를 핑계로 눈물을 쏟는다. 가방하나를 8년 넘게 대물림하느라 사방이 뜯어졌는데 해맑게 학교를 가던 네팔 고아원 아이들이 떠오른다. 어미가 되고나니 세상은 울 일이 더 많아져 버렸다.
우는 일 앞에서 나는 늘 자존심을 세우느라 비겁했었다. 커피타임이 없던 시절 ,동네아줌마들은 우리 집에 모여 멀쩡하게 김치 담다가도 막걸리타임을 만들어 ‘여자의 일생’을 노래 부르고 여자를 구속하는 사회에 저항하듯 집합체가 되어 눈물을 쏟았다. 그 중심의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사춘기의 나는 ‘청승맞다’고 쏘아붙이며 차갑게 굴곤 했다.
양파껍질이 쌓여갈수록 울음거리는 점점 늘어난다. 여간해서는 냉소적일 뿐 빨려 들어가지않던 막장드라마의 뻔하고 험난한 주인공 삶에 나는 분개하여 눈물 흘리고 욕을 뱉으며 제대로 유치해진다. 끝내 나도, 막장드라마처럼 치밀하게 접근하여 보란 듯이 남편과 살림을 차려 내게 치명타를 날렸던 그 여자를 등장시킨다. ‘그래, 남의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했으니 문밖에 나설 때마다 저승길이 열릴 것이다’
막걸리를 같이 마셔주는 동네 아줌마들도 없고 양파도 깔 줄 몰랐던 나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가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우산 속에서 중얼거렸다.
양파 껍질 벗기는 속도가 빨라지고 거칠어진다. 둥근 알몸을 드러내는 양파가 쌓일수록 내 가슴속에서 평생 사라지지 않는 뱀파이어 그 여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약점을 찾아 할퀴고 물어뜯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하다못해 말도 부끄러우면 땀을 흘린다는데 뻔뻔한 줄 알아요’
본전도 찾을 수 없는 빤한 말에 다이아반지와 목걸이를 하고 나온 그 여자는 한껏 교양을 뽐내며 응수했다.
‘이봐요. 나는 말이 아니니까 댁 남편에게 물어봐요.’
뜨겁게 지지고 볶아 단맛 뽑아내는 재주가 약했던 내 인생은 양파처럼 끊임없이 같은 모습으로 벗겨지기 할 뿐 달라지지 않았다. 표피마다 매운 맛을 둥글게 말고 있다가 가끔씩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양파껍질 벗기기는 경지에 올랐는데 양파는 영문도 모른 채 살점이 뜯겨나가고 내 눈물은 점입가경으로 얼굴을 뒤덮는다. 양파에 무너지면 체면이고 교양이고 없다.
수돗물에 얼굴을 씻고 다시 정좌를 한다. 사람들을 울게 하는 양파 앞에 백기를 들고 울음 울 준비를 다시 하는 것이다.
나의 상처는 양파를 닮아 그 껍질을 벗길 때마다 최루성 눈물을 흘려야 한다. 형체도 가뭇하던 것들이 흘리는 눈물과 함께 양파껍질이 되고 만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파껍질 까기는 내 일상에서 제례의식이 되었다. 양파껍질로 환생한 내 아픔은 얄팍하고 고단하게 나뒹굴다 그토록 우습게만 보았던 세상 어미들의 눈물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양파 껍질이 수북하게 쌓일수록 나는 정제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 수필 당선. 現 (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작품집 《육감하이테크》《그대삶의 붉은 포도밭》등 6권. 덕성여대 등 수필강의
이메일: stepany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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