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람 방위산업청 2015.6-7월호 발행인 장명진 편집인 김시철 .디자인 기획제작 성우대드컴 심인보 기획실
뿌리 깊은 신뢰
권 남 희
신뢰도 식물이다. 마음을 쏟고 가꾸어야 깊어진다. 서로 믿는 마음을 씨앗으로 뿌리고 기다려주고 보살펴주어야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세계화시대, 신유목민 세계에서는 스스로 쌓은 신뢰가 더욱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대하는 편이었다. 조용하고 순한 내 성격을 보고 판단하신 걸까. 별탈없이 학교생활도 잘한다고 믿어서인지 필요한 돈을 달라고 하면 어디에 쓸 것인지 묻지 않고 주곤 했다. 친구를 만난다고 하면 당연히 친구려니 여기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무한 신뢰를 보내는 아버지하고의 관계는 늘 든든함이 깔려 있었다. 무명의 풀도 좋은 화분에 심어놓으면 화초가 된다는데 아버지를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고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죄의식이 함께 따라 다녔다.
어머니는 외곬수의 성격도 아니었는데 무엇이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늘 의심이 묻어나는 말투나 눈초리로 따져 물었고 결과물이나 증거물을 보여주어야 했다. 책을 산다거나 학급비같은 명목으로 돈을 달라고 하면 꼭 영수증을 챙겨오라고 하여 확인을 했다. 아는 척하고 지나치는 동네 남학생에게 같이 웃어주면 모르는 척하지 않고 언제부터 알았냐며 따졌다. 친구 집에서 밤을 같이 새우면서 시험공부 한다고 하면 친구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 집에 오빠가 있는지 밝혀내고 갔다. 남동생과 나는 어머니를 대할 때는 잔꾀와 밀당이 기본이었다. 절대 넘어갈 리 없는 어머니를 대할 때는 허물없는 친구처럼 옥신각신하며 대들기까지 했다. 부처도 다급하면 거짓말한다는데 어지간한 것들은 버릇처럼 속이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믿어주지 않을 건데....... 이런 생각이 있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남에게 속아 정말 어처구니없게 사기를 당한 적이 몇 번 있다. 좋은 물건이 있는데 특별히 우리 집에만 주겠다는, 만난 적도 없는 어머니의 고향 먼 친척에게 돈을 선뜻 내 준 일이나 이유없이 친절을 베풀며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접근한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고 떼인 일 등이 그렇다. 허황된 일에 잘 넘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좀 더 생각해보라고 말렸다. 아버지의 의견이 정확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평소에 잘 확인도 하지 않고 내게 돈을 주곤 했던 아버지의 어디에 냉철한 눈이 있었는지 놀랐었다.
어머니는 개울물에서 노는 작은 물고기였다. 채소를 도매 시장에 넘기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여행 계를 만들거나 아이들을 다루는 일 등 일상적 면에는 똑똑했는데 감정이 앞서 눈앞의 것들에만 집착했던 것일까. 의외로 허점을 드러내 그동안 어머니가 쌓았던 신뢰를 한 순간에 잃곤 했다.
어느 날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집과 터가 모두 남의 이름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법 넓은 터에 3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한 법적 등기도 하지 않았다니 우리는 이해 하지 못했다. 외사촌 오빠가 등기이전을 하려고 하다가 집과 땅이 모두 오래전 외할아버지의 친구 분 이름으로 되어있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쌀 몇 가마에 집을 사면서 ‘구두 계약’만 하고 법적인 서류도 만들지 않은 채 100년 넘도록 살아 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라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그런 일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강한 믿음으로 결속된 채 한 동네에 살다보면 굳이 법적인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실이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데다 또 그런 소식을 이웃이 안다면 나쁜 마음을 품고 이용 할까봐 조바심을 내고 불안해했다. 가끔 터지는 뉴스를 보면, 주인을 잃은 땅이나 주인이 버젓이 있지만 법적으로 서류가 안 된 곳만 찾아내 사기치고 팔아넘기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놀라웠던 일은, 외삼촌을 알던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보증을 해주어 등기를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살아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마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들이 깨닫지못하는 사랑과 믿음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나무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지역을 지켜주고 아이들을 성장시킨다.
그런 외가마을도 이제 사라졌다. 외삼촌 세대에서 막을 내린 것일까. 함께 했던 숲과 나무와 아이들의 큰 놀이터였던 마을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새로운 얼굴의 신뢰를 형성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권남희
1987년 월간문학 수필당선. 현 (사) 한국수필가협회 편집주간
작품집《그대삶의 븕은 포도밭 》 《육감&하이테크》등 6권
덕성여대 .MBC아카데미강남, 잠실롯데 수필 강의
이메일: stepany12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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