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의 커다란 산으로 남기를 희망하는 월산 김기동 수필가
문학의 대중화를 꿈꾸며 국제문학인 대회에 참가하교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브라질 등에서 주목받고 있는 수필가. 월산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학발전에 기여를 약속하는 김기동 선생을 만나다.
일시: 2010. 12. 9, 목 오후 1시
장소 : 신도림동 월산 문화재단 집무실
왼쪽부터 김기동 부이사장. 정목일 이사장. 서원순 사무국장. 인터뷰 내용정리하는 권남희 편집주간
김기동 수필가.시인 (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
대담 : 정목일 이사장
정리 : 권남희 편집주간
정목일 : 문학 청년의 열정으로, 왕성한 필력으로 해마다 작품집을 출간하고 계십니다. 오로지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월산문화재단을 설립하게 된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김기동 : 제 꿈의 완성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꽃을 피워 대중화되어야 합니다. 남다른 사명감과 관심을 가지고 심사숙고하여 이 사업에 열매를 맺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유엔에서도 관심을 갖고 외무부로터 법인인가를 받았는데 NGO단체로 등록이 되었어요. 말이 앞서면 안되니까 떠벌이지 않고 조용히 국내외 뜻있는 분들의 협조를 얻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버금가는 상금을 주는데 적어도 4년에 한번이라도 성사되도록 해야되지 않겠어요. 세계화를 시키면 세계적인 문학상이 되어 큰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지난해 1월 뉴욕에 초빙받아 갔을 때 세계가 우리나라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느꼈습니다.
정: 굳이 힘들게 문학을 하지 않아도 성공한 종교인으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수필과 시 쓰기에 몸이 부서져라 몰입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김 : 국제시인대회에 참가했던 이탈리아나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들었지만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 ‘성직자가 문학을 하느냐? ' 그런 놀라움이 담긴 반응이 많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꿈도 많고 이루싶은 일도 많았는데 그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문학성으로 응축되어있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등대를 꼽으라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누이같은 아내 강순씨입니다. 가난과 굶주림 ,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서도 선생님이 있었기에 살 수 있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나의 슬픔>제목으로 글을 써냈는데 천안군 산하 교육청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이제 희수의 나이 앞에서 돌아갈 곳은 월산입니다. <월산에 핀 진달래> 작품에서도 밝혔지만 고생하면서도 거북이처럼 살자고 다짐했던 옛날 소년시절로, 가진 것도 없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때로 돌아가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정 : 아무리 자신을 낮춘다 해도 월산으로 돌아가면 금의환향이겠지요?. 국제시인대회를 다녀오시고 오히려 외국에서 작가의 입지가 더 확고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성과라면 어떤 점을 들 수 있습니까.
김: 조심스럽습니다. 나 역시 문학에 대한 기초도 있는데 평론의 속성상 혹독할 때도 있지요? 그럼에도 기뻤던 일은 유럽 최대의 연합통신( EFE)과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나의 문학세계가 유럽 전역에 소개 된 점이고 문학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라틴아메리카 대학에서는 내 시를 가지고 교재로 쓴다고 들었습니다.
정: 늘 한국수필가협회와를 아끼고 챙겨주는 바탕에는 돌아가신 조경희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 그분의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月山이라는 아호도 조경희 선생께서 지어주셨지요. 대단한 분입니다. 저의 문학적 열망을 한눈에 알아보고 수필로 등단하도록 도와주셨고 나중에 한국수필문학상도 주셨으니까요. 비록 조경희 선생은 떠나셨지만 한국수필가협회를 돕고 싶어 세미나같은 큰 행사가 있으면 재단 측에 적극 협조하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세계에 협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바람직한 일들을 하고싶습니다.
정: 감사드립니다. 신묘년에는 한국수필가협회에 좋은 일이 있도록 큰 사랑이 담긴 계획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필을 사랑하는 후학들을 위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순수한 마음을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문학인의 세계에도 서로 존종하고 뜻이 아름답다면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겠지요. 문학을 시작한 시기가 중요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예술적 재주는 타고나는 것이지요. 제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고 성직자 일을 할 때 쏟아졌던 비난과 공격을 묵묵히 극복해가면서 가진 호가 視無言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후에 공부를 하여 기독교 서적만 200여권을 내고 장학금 150억을 만들어 베뢰아아카데미를 설립하여 400여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논란은 사라졌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버려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시끄럽기만 하지 않습니까?. ‘시무언’ 의 자세로 가야겠지요.
정: 다방면에 다재다능합니다만. 젊은 날 영화 쪽에도 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김: 온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열여섯소년 가장으로 살아가기는 너무 힘들었는데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함구할 수 없어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쫒기게 되어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그 때 우연히 영화를 알게 되었고 시나리오와 연기공부를 하면서 <사형수> 시나리오를 써지요. 군사정권에 의해 압수당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농사일에 매달려 살며 거북이 철학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
정: 사회가 아무리 바뀌어도 문학의 뿌리는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댓글, 일상의 개인 기록, 감상글 모두 문학의 기본이지요. 문인들에게 말씀을 주신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
김: 문학이 발전을 해야 나라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쉬운 점은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으로 있을 때 조금만 노력하면 문학인을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많은 문인들을 두고 정부의 무시를 받도록 기회를 잃었다고 봅니다. 외국은 문학에 투자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문학을 무시하여 사회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학의 중요한 뿌리는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인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르가 수필입니다. 수필을 모르고 소설을 쓰니까 세상이 수렁에 빠져버립니다. 수필은 과학적이고 지성과 양심의 조합이기에 도덕적으로 위태로우면 좋은 수필문학이 나올 수 없지요. 새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수필집을 보내주면서 진솔감, 영혼이 맑은 심성닦기를 기도합니다.
정: 문학과 신앙은 어디까지나 다른데 문학성에 대해 검증 하려하는 일도 겪었다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김: 한국수필가협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늦게 등단했기 때문에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문학에서 종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동안 문학에 대한 꿈은 밑둥만 남은 나무처럼 있었지요. 일본교토에 가면 나무를 벌목할 때 밑둥을 완전히 베어내지 않고 1미터 정도 뿌리를 살려 새로 가지가 나오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문학도 어려운 삶 때문에 몸통이 잘려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뿌리는 살아있었지요. 새로 나온 가지로 자연을 노래하고 우주를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목사님은 작품집에 왜 ‘주님’을 안쓰느냐고 물었는데 문학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고주배기로 살아 숨쉬던 내 문학에 새 가지가 돋아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정: 시처럼 아름다웠던 노랫말이 사라진 시대, 선생님의 수필을 읽다보면 한국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국수필가협회의 발전을 위해 애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세계적인 문학 행보로 한국을 알리는 선생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김기동 약력
아호 月山 . 視無言 . 성락교회 개척. 목사. 수필가. 시인. 신학박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쿠바.하바나 국제시인대회 명예조직위원장. 한국수필 등단. 제 22회 한국수필문학상 . 수필집 『이야기가 있는 산』외 2권 . 수상록 『내 평생에 』외 10권. 시집『가슴에 그림 美花』외 4권. 칼럼 『나는 보고도 벙어리처럼 산다』외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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