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한국수필2

2011년 12월호 한국수필 발간

권남희 후정 2011. 12. 6. 15:48

 

 

자카렌타 꽃나무

鄭 木 日( 한국문협 부이사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11월 초순 ,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자카렌타 꽃나무를 만난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축복과 은총이었다.

한국의 11월은 지구의 반대편의 시드니에선 무르익는 5월이었다. 자카렌타꽃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 오월을 빛내기 위해 하늘이 내려주신 연보라 수정 궁전……. 에메랄드 장식의 보석 관을 쓰고 보랏빛 꽃 레이스로 수놓은 원피스를 입은 스무 살 공주가 청신하게 웃고 있었다.

자카렌타 꽃나무는 우아함과 청신함을 마음껏 뿜어 올리는 보랏빛의 분수(噴水)가 아닐까. 은은하게 선명하게 빛나는 순결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일생 중 가장 화려한 옷을 차려 입고 파티장에 나타난 성장한 공주의 눈부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듯한 이마, 향기로운 머리카락, 꿈에 젖은 눈동자, 붉은 뺨, 보랏빛 미소를 띄우는 오월 공주의 청순, 우아, 순결의 아름다움이 맑은 햇살 속에 빛나고 있었다. 자카렌타 꽃나무는 지휘자가 되어 경쾌하고 향기로운 봄의 관현악을 연주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에게도 누구나 이런 절정의 청춘기를 맞으면서도 까마득하게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온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 행복을 모르고 지나치고 만다. 여러 가지 조건과 삶의 처지가 좋지 않아서 우울과 비탄으로 가장 빛나는 절정의 순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시들게 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와서 이 오월 공주의 모습을 한 번 친견(親見)하는 것만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향기로운 매혹과 맑은 도취 속에 있음을 느낀다. 이국(異國)의 여행자로서 자카렌타 꽃나무를 보며 느끼는 경이감은 한국에선 보랏빛 꽃나무가 드물다는 데도 있을 성 싶다. 한국의 보랏빛 꽃은 오동나무꽃, 도라지꽃, 엉컹귀꽃, 창포꽃 정도에 불과하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힌 우람한 나무가 일제히 꽃송이를 터트려 보랏빛으로 채색해 놓는 모습을 보고 저절로 경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자카렌타(Jacaranda)는 낙엽교목으로 원산지는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이며 미국 남부와 스페인의 해안, 이탈리아 해안지역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렐리아 등 전 세계의 열대와 아열대에 분포돼 있다.

자카렌타 꽃은 하나씩의 꽃송이를 피워내는 게 아니다. 수십 년 수령(樹齡)의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일제히 꽃송이들을 피워 거대한 보랏빛 꽃 궁전을 이뤄놓는다.

한국의 오월은 매화, 목련, 벚꽃 등 나무의 꽃들이 시들고, 일년초 꽃들이 자리잡는 계절이다. 시드니의 봄인 11월은 자카렌타 꽃나무로 세상을 신비와 경이감으로 채색시키고 꿈과 황홀감을 선물해 준다. 녹색의 들판과 거리에 띄엄띄엄 자카렌타 꽃나무들의 우람한 꽃 궁전이 들어서서 밤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반짝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보랏빛 꽃송이들은 별빛 보석으로 빛나며 눈동자 속으로 들어와 봄을 속삭이고 있다.

자카렌타 꽃나무는 일 년 동안 집중력을 쏟아 부어 2달간 꽃 궁전을 이루고 벚꽃처럼 일제히 꽃송이들을 떨어뜨려 절정의 순간에서 물러간다. 두 달간의 극치를 위해서 10달 동안 빈가지로 고독 속에 지내야 한다. 자카렌타 꽃나무가 보랏빛 꽃 궁전을 지어내 경탄과 찬탄을 받기까진 오랜 희생과 고독과 시련을 견뎌낸 인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자카렌타 꽃나무의 수고(樹高)는 3~15m 정도로서 한국의 정자나무처럼 사방으로 가지를 뻗힌 늠름한 위용을 자랑한다. 일제히 보랏빛 보석들로 장식하고 꽃 궁전을 이룬 모습 앞에는 얼이 빠져 할 말을 잃고 만다.

장미나 국화 난초처럼 하나씩의 꽃들이 보여주는 단조롭고 평면적인 느낌과는 다르다. 하늘 사방으로 뻗어 오른 천 갈래 만 갈래 가지마다 보랏빛 보석을 매단 꽃 궁전을 보면, 미의 황홀경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런 맑은 보랏빛 도취는 하늘과 깊은 소통과 영감을 불러오며 지나간 청춘의 봄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마다 인생의 봄이 있어 자신의 꽃을 피워내고자 한다. 2달간의 자카렌타꽃을 피우기 위해 빈 가지인 채로 10달을 기다려 온 나무가 드디어 보석 꽃들을 피워내듯이 일생에 한 번은 절정의 순간을 맞아야 한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보랏빛 꿈을 꾸면서 어려웠던 세월을 견뎌낸 자카렌타 나무는 별이 되어 형형한 보랏빛 보석들로 반짝거리고 있다.

인생의 오월이 지났다고 포기하고 한탄하고 말 것인가. 나도 이제 기우는 연령이건만, 오월의 봄을 맞아 자카렌타꽃을 피워내고 싶다. 자카렌타 꽃나무를 가슴에 품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내 인생의 오월, 보랏빛 꿈의 궁전을 피워내고 싶다.

자카렌타 꽃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에서 만난 최고의 기쁨이었고 경이였다. 내 마음 속에 보랏빛 자카렌타 꽃 궁전이 눈부시다.